마음은 마모된다.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없다. 녹슬고 사라져 부스러진다. 피넥사라는 그런 것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것과, 그들을 바라보던 눈길과, 직접 꽃을 틔웠던 대지와, 그리고 함께 서서 웃던 얼굴들. 시간에 지나 천천히 마모되며 씻겨 내려간다. 마치 모든 부정을 녹아내리게 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은 물과 같다. 가둬둘 수도 없고, 영원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이 흘러가 사라진다. 참, 권태로운 세상이다. 피넥사라는 만년설을 꼭 닮은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저희를, 바라봐 주세요."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없다고 여겼건만 이 빌어먹은 사랑은 또 영원한 것이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피넥사라는 권태로운 눈빛을 하고 그를 바라본다. 나는 너희의 곁에 있었어. 언제나. 그 말을 내뱉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피넥사라는 말을 꺼낸 그의 앞에 서서 말을 전했다. 내가 좋은 것을 알려주마. 그 누구도 찾지 않게 된 옛 기록을 찾아보렴. 진실은 모두 거기에 있을 테니... 피넥사라는 이런 말을 내뱉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빌어먹을 희망이란 잘도 생겨났더라. 다시는 전처럼 웃게 될 수 없던 불사조는 과거를 그린다. 함께 서서 웃던 일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표정을 떠올린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은 영원에 가까운 삶을 기억하며 떠나보내게 되는 것이라고.
피넥사라의 말을 들은 이는 바로 옛 기록을 찾아 나섰다. 그 누구도 찾지 않은 옛 기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기 힘든 곳인 만큼 옛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도 않았고, 또한 불태운 기록도 많았다. 그럼에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기록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서 오래된 서적을 받았다. 짧은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고서를 펼쳤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어찌나 열심히 복원하고 관리했던지 책장을 넘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피넥사라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나 곁에 있었다고 말하는 고귀한 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인간다웠기 때문에. 무엇이 신을 인간답게 만든 것인지. 왜 그토록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
하지만 머지않아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신이라 불린 수호령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신은 그저 슬퍼할 뿐이었다.
우리의 수호령이 사람의 곁을 떠난 순간을 기억한다. 수호령께서는 모든 생명이 서로를 해치는 모습을 눈에 담고 떠났다.
그들은 신이라 불린 수호령이 남긴 모든 말을 잊었다. 옳은 이는 없다. 사실 모든 이가 옳지 않다. 그리하여 영원불멸이란 없다. 옳은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전부 틀린 것이니, 필멸자의 생각이란 틀릴 수밖에 없으니,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고 포용하며 살라. 수호령께서 진정으로 떠난 이유를 기억하라.
우리들은 죄를 짓고 있다. 첫 가르침은 모두 잊어버린 것이 그 증거였다. 우리의 가장 큰 죄를 기억하라. 그것은...
그렇게나 사람들에게 실망했던 이유가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자식처럼 아끼는 이들이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것에 상처받아서... 고작 이런 이유로. 그는 책을 덮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잘못된 지식을 익혀 그것이 진실인 줄만 알았던 어리석은 이였으나, 마주한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참된 신자였다.
어떤 것은 모르는 것이 더 낫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는 것은 힘이지만 때로는 독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진실은 그렇게 작용한다. 알아야만 하지만 모르고 싶은 것.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믿어온 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차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진정으로 신을 따랐다. 하지만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한 이는 신이 아니었다.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나 신일 수 없었다. 본인이 그것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시체들이 의미 없는 살육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혀 고귀한 게 아니었다. 신이 제물을 원하지도 않았다. 믿어온 사실이 부정당함에 따라 의지마저 흩어진다.
"진실을 목도한 기분은 어떠니."
이제는 신이라고 불린 이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은 지독하게도 권태롭고, 모든 의미가 녹슬어 사라진다. 이것이 나의 죄요, 우리의 죄요, 수호자를 떠나게 한 생명의 죄로다. 죄송합니다. 무엇에 대한 사죄라고 묻는다면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엇에 대한 사죄인지 본인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해온 행동에 대해서, 자신의 무지함에 대해서, 모든 이들의 그릇된 믿음에 대해서... 우리를 사랑한 당신이 느꼈을 슬픔을, 감히 외면해서는 안 됐는데.
"인간 아이야. 나는, 너희의 칼이 내 심장을 파고들었던 것이 슬픈 게 아니었어. 결코 아니었지..."
"그것을 알게 되었지만 외면하지 않았구나. 오래 전 너희가 저지른 잘못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사과하는 것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야."
그동안 느낀 모든 마음에 온전한 사죄를 건넬 수 없음에 용서를 구한다. 피넥사라는 어떠한 이름 모를 감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것은 기쁨 같기도 했으며, 쓸쓸함 같기도 했고, 아픔이나 고통과도 비슷해 보였다. 하나의 행복에 수십 가지의 고통이 따라붙는 것이 어찌 삶이 아닐 수 있으리. 나에게도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지. 그 때가 아직도 생생해. 나의 친우들과 함께 너희의 옆에 서서 웃던 순간을 잊으려 해 본 적도 없었단다. 피넥사라는 가만히 눈을 감다가 눈을 떴다. 수호령은 결코 웃지 않았으나 그것이 미소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설원의 한기가 언제까지고 너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마. 수호령은 그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불사조가 다녀간 자리에는 미약한 풀내음만이 풍겼다.
모든 마음은 영원에 걸쳐 녹슨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녹슬지 않는 것이 있노라면, 그것은 분명히, 만년설을 닮은 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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