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잊히지 않을 마음이란.

by @Zena__aneZ 2024. 6. 28.

킬리움은 장갑을 고쳐 끼고 저보다 몇 배나 큰 마물을 가볍게 뛰어넘어 치명상을 남기고 가볍게 착지했다. 온갖 유적지와 던전이라 불리는 곳을 돌아다니며 오래된 유물을 수집했기에 튼튼한 옷과 장비, 그리고 그에 맞는 실력은 필수였다. 그 안에 득실거리는 마수를 하나하나 죽여가며 특히나 비싸게 거래되는 마석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곤 돈이 될 만한 것을 찾는다. 주변을 둘러보다 책 몇 권을 주워든다. 킬리움의 스승은 책은 가끔 꽝인 것도 있지만 보석보다 훨씬 더 비싸게 거래될 때도 있으니 본다면 챙겨 오라고 했다. 사실 꽝이어도 킬리움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킬리움은 그저 글자가 좋았다. 마침 그의 스승은 유능한 복원가였고 그는 무언가를 보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최고의 조합이었다. 마석과는 달리 제법 소중하게 가방 한 편에 넣어두고 던전에서 벗어난다.

"스승님!"

"너, 몸도 다 안 나았으면서 어딜 나돌아다녀?"

부상을 입은 몸이니 그렇게 주의하라 했건만! 걱정 어린 말을 쾌활하게 웃어넘긴 킬리움은 가방에서 책 몇 권과 중급 마석 하나 꺼내 넓적한 쟁반 위에 올려둔다. 스승님, 비싼 거 주워오는 제자 기특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부러워하던데.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것을 눈에 담던 얀타누아는 킬리움의 머리를 콱 쥐어박는다. 누가 제자가 무리하는 걸 좋아해? 짧은 한숨을 내쉬던 얀타누아는 잠시 내려놓은 안경을 도로 집어 들어 쓰고는 흰 장갑을 끼고 책 두 권을 집어 들었다. 책에 묘한 황금빛과 하얀 안개와 같은 빛무리가 일렁인다. 3시간 정도 걸리니 그동안 자고 있으라는 말까지 전해 듣고 비적비적 작은 손님방으로 기어들어가듯 해선 침대에 누웠다.
기절하듯 잠든 그 꿈에서는 과거의 추억이 나온다. 꿈속에서는 얀타누아의 다정하고 친절한 음성이 낮게 울린다. 이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길 잃고 혼자 떠돌던 킬리움을 얀타누아가 거둬들였다. 그리고 늘 얀타누아가 읽어주던 책에 매료되어 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검고 푸른 글자들이 마치 어린 시절 제게 내비치던 다정함과 같아서.

"킬리움."

낮고 다정한 음성이 퍼진다. 킬리움이 어렴풋한 잠에서 깨어나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다 제 스승을 바라본다. 책 복원 끝났어요?

"그래. 하지만, 이번에는 한참 잘못 주워온 것 같다."

이거 일기장이야. 그것도, 자식을 가진 부모의. 킬리움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책을 받는다. 킬리움에게는 부모란 너무나도 멀고 흐릿한 존재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그는 어머니의 쌍둥이, 지금 제 스승인 이에게 거둬들여졌다.

킬리움은 책을 한 장 넘겼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떠났다. 그 사이에서 스승인 사람을 처음 보았다. 오래도록 왕래가 없었다고 했다.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연이 끊겼다고... 하지만 우연히 연락이 닿았고, 죽은 형제의 아이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킬리움은 나름 안심했다. 그래도 혼자 버려지진 않았구나. 잡생각을 치우고는 책의 첫 줄에 시선을 둔다.

 

나의 사랑하는 아이, □에게.

일기장의 처음을 볼지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이에게 쓰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킬리움은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사랑해, 보고 싶어. 유일한, 그런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기란 자기 자신만 보는 것인데 남에게 편지를 쓰는 것에는 대체 어떤 미련인지. 킬리움은 일기장을 읽으면서 그만 읽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이란 기록을 남긴 것이지만 일기장은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는 글이니까. 하지만 한 줄이 일기장을 덮는 것을 막았다.

 

우리 아이가 많이 아파. 나아야만 하는데, 그럴 수 없대.

이들도 누군가를 잃었을까. 상실이 아팠을까. 멀쩡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킬리움은 오래전 쓰인 일기장을 보면서 그들의 사랑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왜 돌아가셨을까. 아버지는 왜 떠났을까. 오랫동안 묻어둔 질문들이 쏟아진다. 고작 일기장 하나로. 특별한 추억도 없는 가족은 왜 이렇게나 애틋한지.

 

아가야, 우리는 네가 죽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어.

그럼에도 죽는다면 네가 죽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살면서, 네 이야기를 할 거야.

모두가 너를 잊지 않게 만들 거야.

킬리움은 문득 책의 맨 뒷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 일기장을 쓴 사람의 이름, 혹은 필명이 적혀있다. 이데아 칼립소라. 유명한 극작가. 어린아이들을 위한 연극을 쓰고, 연극에는 항상 비슷한 외형의 어린아이가 등장했다. 그는 일평생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그의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가 만든 모든 연극에 그의 아이가 나왔으니까. 그리고 그 연극은 이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이 되었다. 이렇게 기억되었다. 어떤 마음은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 킬리움의 부모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그 마음을 들어보고 싶었다.

 

"책 내용은 어때."

 

"나쁘지 않네요! 책장에 잘 꽂아놔야겠어요."

 

"... 내 동생은 널 사랑했어. 네 아버지도, 널 사랑했고."

 

"가족이라서 편 들어주는 건 아니죠?"

 

내가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괜히 말하기는. 가만히 눈을 감고 짧은 한숨을 내쉰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으니 더 자라는 말을 듣고는 침대에 눕는다. 어떤 마음은 이렇게 전해진다. 누구를 들일 일도 없으면서 손님방이라는 이유로 계속 비워두는 방 한편처럼.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들은 설원에서 노래하네.  (0) 2024.07.04
별빛이라 여겨진 사람.  (0) 2024.06.30
사랑의 저주.  (0) 2024.06.26
주술과 생명.  (0) 2024.06.23
언젠가의 가능성.  (0) 2024.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