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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언젠가의 가능성.

by @Zena__aneZ 2024. 6. 23.

바니타스 세계관
: 릴리가 다른 이들을 만나면


릴리 -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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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봐왔다. 악행에 관한 것, 사람의 믿음에 관한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변질되는 이야기까지. 그것들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들은 끝없는 분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평온한 곳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 중앙지역과 비슷한 곳. 낙원과 같은 곳을. 누군가는 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원하는 곳을 만들어나갔다.

처음에는 많은 문제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나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분쟁 속에서 살아간다. 사실은 속부터 썩어가는 보기 좋은 과실일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없어져버린 자신의 친우라면 알 수 있을까,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망설임 없이 대검을 꺼내 들어 마법의 핵심을 꿰뚫으려 했으나 그것은 물을 베는 느낌만 들게 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마나 조각과 투명하게 형성된 벽이 압도하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런 강렬한 마법을 행하는 이를 알아채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그는 대검을 든 손을 내린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여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나누는 인사 치고는 격한데, 릴리."

 

얼마만에 담아보는 이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겠거니 했다. 다만 흘러간 시간만큼 마음에도 균열이 생겼으니, 이 틈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으리라.

 

"나도 이런 식으로 인사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릴리는 자조적이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늘 보이던 밝고 쾌활한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소실된 것인지. 그로써는 릴리가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가 깨달을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시는 과거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우리의 고향이 왜 이 꼴이 됐는지, 나에게 아주 자세히 설명해야 할 거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을 작정이라면 집어치워, □□. 넌 북부의 대표로 있을 자격조차 없으니까. 릴리는 그에게 인간의 얼굴이 남아있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했다. 릴리가 생각하던 것과 완벽하게 같은 표정일지, 혹은 다른 표정이었을지.

 


릴리 - 서리(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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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이었다. 산제물로 바쳐질 사람의 손을 잡아끌고 걸음을 옮겼다.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신의 곁으로 떠나는 일이니 영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무지함은 죄악이 되곤 했으나, 그는 그조차 깨닫지 못했다. 무지함은 죄악인가. 언젠가의 과거에 그런 질문을 던졌던 친구가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통증이 느껴진다. 북부의 한기를 이용하여 채 막기도 전에 물처럼 흐르는 마나가 몸을 짓누른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투명한 마법은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역으로 펼쳐진 보호막 위로 노크하듯 두드린다. 당장 깨부수고 나가기에는 어렵겠거니 싶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일 이는 과거에나 지금에나 딱 한 명뿐이었다.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의, 조금은 그립기도 했던...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평이한 어조로 내뱉는 괴리감만이 가득한 말이 물결처럼 퍼진다. 그 말을 들은 이는 표정을 왈칵 구긴다. 그가 데려가던 사람에게 정성껏 치유마법을 걸어준 이가 그를 매서운 눈길로 바라본다.

 

"그 말은 내가 해야지.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듣던 이는 헛웃음을 내뱉는다. 내가 이래서 내 고향이 싫다는 거야.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잖아. 그걸 듣던 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기울였고, 그것을 바라보던 이는 표정을 더욱 구길 뿐이었다.

 

"어떤 것이 죄인지 알려줘, 내 친구."

 

"알려줘야만 알 수 있는 거야? 진심으로?"

 

네가 하는 건 그저 살인이야. 의미없는 학살극이라고. 신에게 닿느니 뭐니, 그딴 개소리를 할 거면 지옥에나 가서 해. 내가 친히 지옥까지 함께 기어들어가서 들어줄 테니. 그는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이건 의미 없는 학살극이 아니야. 이단자의 처단이지. 북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너는 천국으로 가야지. 그곳이 더 잘어울리니까."

 

"지금 이단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 권력계층은 단 한 명도 없었어. 그 망할 신이 그리 공평하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깨끗한 북부를 원한다면 권력계층부터 불태워버려야지."

 

나는 그딴 낙원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원하지 않았으니까. 원하지 않는 낙원은 지옥일 뿐이야. 그러한 말에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릴리 -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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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부의 바람은 어딘가 항상 건조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 건조한 바람을 맞으면 언젠가의 추억이 생각나곤 했다. 북부의 바람과, 곁에 머물던 목소리와, 이윽고 흩어져버린 감정과 같은 것. 원하는 곳으로 떠나라는 목소리와 비난의 목소리. 바람을 타고 넘실거리는 모습. 자주 찾던 친우의 무덤은 이제는 어쩔 때 한번씩 찾는 곳이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정도 마모되어가는 것인지, 혹은 그것을 마주하고 슬퍼하기가 벅찼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친우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였다. 친우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이가 서있었다. 그저 닮은 이겠거니, 했지만...

 

"안녕, ■■. 오랜만에 만나네."

 

릴리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그의 손에선 힘이 풀린다. 친우에게 바칠 물건은 바닥에 떨어지고, 그는 걸음을 옮겨 오랜 친우를 끌어안았다. 키가 훨씬 큰 그가 상대를 안은 것이지만, 어쩐지 그가 안긴 것만 같았다. 못 본 새에 어린애가 다 됐구나! 장난스러운 말을 건네면서도 느릿한 손길로 등을 토닥였다. 

 

"너를 떠나보내고 후회도 많이 했어. 열심히 버텨냈어. 열심히 살아냈고, 많이 힘냈어. 그런데도 문득, 다리가 꺾이는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돼."

 

"알아,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널 보냈던 거야. 계속 머물렀다면 넌 틀림없이 꺾이게 됐을 테니까."

 

"네가 보내준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나는..."

 

"... 참 이상한 일이지. 오로지 기계뿐인 육신에서 눈물의 향기가 나."

 

손길이 따뜻하다. 목소리가 울렸다. 긴 시간의 설움이 쏟아져내린다. 릴리는 그것을 모두 들었다. 겨우 무너지지 않으면서 외롭게 버텨냈구나. 혼자 힘냈네, 고생했어. 다 이해해. 전부 다 이해하고 있어. 이제는 슬픔을 마음껏 쏟아내. 견디기만 해서는 나아질 수 없으니까. 그런 다정한 목소리만이 고이고 고인 감정들을 씻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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