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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로그 선물

새로운 날의 축복을.

by @Zena__aneZ 2024. 7. 21.

여명의 어슴푸른 녹빛 햇살이 시원스레 쏟아진다. 녹빛 하늘 아래서 시선을 주고받던 둘은 금세 웃어버리고 말았다. 곱게 차려입은 정장이 부드러웠다. 맞잡고 있던 손에 간질간질한 온기가 전해진다. 봄바람이 불어와 잘 다듬어놓은 머리칼 끝을 옅게 흐트러뜨린다. 마주 잡은 손 대신 다른 손으로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준다.

"결혼식 날인데, 기분이 어때?"

"어제처럼 긴장되진 않네요. 오히려 차분해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뺨에 온기가 닿았다. 흐드러진 머리칼을 조심히 넘겨주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투명한 푸른 눈과 금빛 눈이 지독하리만치 잘 어울린다. 둘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짧은 웃음소리 끝에는 길고도 짧은 대화가 오간다. 아이작과 현, 둘의 첫 만남부터 같이 지내게 된 일련의 과정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이 겹친 성과였고, 그런 성과는 가히 운명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운명이라는 거, 전혀 믿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마찬가지야. 그런 대화에는 여전히 간질거리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파도꽃을 꼭 닮은 흰 정장과 흑단처럼 멋들어진 검은 정장이 제법 잘 어울렸다. 곱게 꾸며진 야외 정원의 테이블과 온갖 빛깔의 꽃으로 가득한 화단, 그리고 예쁘게 꾸민 꽃 아치는 정말 결혼식이 눈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듯했다.

가장 먼저 온 손님은 다른 지역의 수호령들이었다. 수호령의 결혼식에 빠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 사이에선 현이 가장 어린 수호령이었으니까.

"네가 어렸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다 커선, 벌써 결혼도 하고!"

선명한 푸른 색채를 가진 이가 퍽 시원한 웃음을 짓는다. 녹빛 색채를 가진 이가 잠시 눈을 감고는, 누가 보면 네가 키운 줄 알겠다고, 내가 키웠는데 말이야. 그런 장난식의 말에 또 웃음이 흐른다. 눈부신 흰 색채를 가진 이가 노랗고 푸른 꽃이 가득 엮인 화관을 둘에게 씌워 주었다. 둘의 앞날을 축복할게. 그런 대화가 오갔다. 다른 세 지역의 수호령에게 모두 축복받는 결혼식이라니, 이만큼 벅차고 행복한 결혼식이 또 있을까?
수호령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축복하겠다는 말이 끝나고 난 뒤에야 다른 이들이 발걸음을 들였다.

"느, 늦게 온 건 아니죠?"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다며 현이 태연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아이작은 조금 머쓱한 듯 뒷목을 어루만지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와줘서 고마워. 그 말에 이즈멜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진솔한 사과 한 마디가 모든 간극을 메울 수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터였다. 둘은 이전의 친한 사이까진 되지는 못해도, 이제는 제법 평범하게 사이 괜찮은 이들처럼 보였다.

"현 씨, 힘내세요."

"내가 힘내면 너희 형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고요? 완전한 농담 섞인 말에 이제는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냐며 웃음을 흘린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리가 없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하늘은 완연한 푸른빛으로 물든다. 현이 사랑하는 이의 눈 색과 꼭 닮은...
결혼식의 시작을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아이작과 이즈멜의 부모 되는 이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형식적인 말을 나누었다. 와주어 고맙다, 그래도 자식의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야 하지...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도 함께 듣는다. 잘 커준 네가 자랑스럽다고. 결혼하는 것을 축하한다고. 아이작은 부모의 품이 그립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품에 안기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을 앞에 두고 울 수는 없었으니 그만큼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축하해 주어 고맙다고. 이제는 드디어 다 괜찮아졌다고...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배우자가 될 이에게 안겼다가 손을 단단히 마주 잡는다.

하얀 버진로드 위에서 나란히 걸었다. 같이 살아가며 많은 일이 있을 터였다. 결국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영원히 그리워해야만 할 테다. 그럼에도 같이 살아가는 것은 운명이고 기적이며 축복이니, 죽음이 갈라놓더라도 사랑하겠노라고. 햇살이 짙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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