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어슴푸른 녹빛 햇살이 시원스레 쏟아진다. 녹빛 하늘 아래서 시선을 주고받던 둘은 금세 웃어버리고 말았다. 곱게 차려입은 정장이 부드러웠다. 맞잡고 있던 손에 간질간질한 온기가 전해진다. 봄바람이 불어와 잘 다듬어놓은 머리칼 끝을 옅게 흐트러뜨린다. 마주 잡은 손 대신 다른 손으로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준다.
"결혼식 날인데, 기분이 어때?"
"어제처럼 긴장되진 않네요. 오히려 차분해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뺨에 온기가 닿았다. 흐드러진 머리칼을 조심히 넘겨주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투명한 푸른 눈과 금빛 눈이 지독하리만치 잘 어울린다. 둘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짧은 웃음소리 끝에는 길고도 짧은 대화가 오간다. 아이작과 현, 둘의 첫 만남부터 같이 지내게 된 일련의 과정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수많은 우연이 겹친 성과였고, 그런 성과는 가히 운명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운명이라는 거, 전혀 믿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마찬가지야. 그런 대화에는 여전히 간질거리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파도꽃을 꼭 닮은 흰 정장과 흑단처럼 멋들어진 검은 정장이 제법 잘 어울렸다. 곱게 꾸며진 야외 정원의 테이블과 온갖 빛깔의 꽃으로 가득한 화단, 그리고 예쁘게 꾸민 꽃 아치는 정말 결혼식이 눈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듯했다.
가장 먼저 온 손님은 다른 지역의 수호령들이었다. 수호령의 결혼식에 빠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 사이에선 현이 가장 어린 수호령이었으니까.
"네가 어렸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다 커선, 벌써 결혼도 하고!"
선명한 푸른 색채를 가진 이가 퍽 시원한 웃음을 짓는다. 녹빛 색채를 가진 이가 잠시 눈을 감고는, 누가 보면 네가 키운 줄 알겠다고, 내가 키웠는데 말이야. 그런 장난식의 말에 또 웃음이 흐른다. 눈부신 흰 색채를 가진 이가 노랗고 푸른 꽃이 가득 엮인 화관을 둘에게 씌워 주었다. 둘의 앞날을 축복할게. 그런 대화가 오갔다. 다른 세 지역의 수호령에게 모두 축복받는 결혼식이라니, 이만큼 벅차고 행복한 결혼식이 또 있을까?
수호령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축복하겠다는 말이 끝나고 난 뒤에야 다른 이들이 발걸음을 들였다.
"느, 늦게 온 건 아니죠?"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다며 현이 태연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아이작은 조금 머쓱한 듯 뒷목을 어루만지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와줘서 고마워. 그 말에 이즈멜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진솔한 사과 한 마디가 모든 간극을 메울 수는 없겠으나 그럼에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터였다. 둘은 이전의 친한 사이까진 되지는 못해도, 이제는 제법 평범하게 사이 괜찮은 이들처럼 보였다.
"현 씨, 힘내세요."
"내가 힘내면 너희 형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고요? 완전한 농담 섞인 말에 이제는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냐며 웃음을 흘린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리가 없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하늘은 완연한 푸른빛으로 물든다. 현이 사랑하는 이의 눈 색과 꼭 닮은...
결혼식의 시작을 코앞에 두고 있을 무렵 아이작과 이즈멜의 부모 되는 이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형식적인 말을 나누었다. 와주어 고맙다, 그래도 자식의 결혼식인데 당연히 와야 하지...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도 함께 듣는다. 잘 커준 네가 자랑스럽다고. 결혼하는 것을 축하한다고. 아이작은 부모의 품이 그립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품에 안기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을 앞에 두고 울 수는 없었으니 그만큼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축하해 주어 고맙다고. 이제는 드디어 다 괜찮아졌다고...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배우자가 될 이에게 안겼다가 손을 단단히 마주 잡는다.
하얀 버진로드 위에서 나란히 걸었다. 같이 살아가며 많은 일이 있을 터였다. 결국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영원히 그리워해야만 할 테다. 그럼에도 같이 살아가는 것은 운명이고 기적이며 축복이니, 죽음이 갈라놓더라도 사랑하겠노라고. 햇살이 짙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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