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설화는 어떤 명망 있는 집안의 여식이었다. 누구보다도 똑똑한 아이였고 재능도 많이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을 제때 꽃 피우는 일은 없었다. 은설화에게 집은 너무나도 냉정한 곳이었다. 형제들의 시기를 받는 일은 흔했고, 어린 나이에 독을 먹는 경우도 흔했다.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훈련이라곤 했으나 설화는 이 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 독을 보낸 것이 어느 형제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설화는 결코 자신의 앞에 닥친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피할 수도 없었거니와 할 수 있는 것이 피하지 않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사실 그것도 떠밀려 한 선택일 뿐이었으니 할 수 있는 것도, 해낸 것도 없었다.
무엇이 섞여있는지 알 수 없는 잔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다른 어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맑고 투명한 초목을 담아낸 것만 같은 눈은 어떤 부정이라도 씻어 내릴 듯했고, 그것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설화라고 했던가요? 여식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하하, 과찬입니다. 어른들끼리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설화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칭찬에 고맙다고 하는 것도, 혹은 다른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웃는 것도 일찍 철이 든 설화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가 이리 의젓하니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분명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들려왔다.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설화는 그저 일찍 철들어 눈치를 보는, 보이지 않는 상처로 뒤덮인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는데. 그럼에도 다른 어른의 권유를 거절하기에는 이후가 두려워 잘 빚어낸 웃음을 짓고 따른다. 어른들은 또 그것을 보며 만족할 뿐이었다.
끊임없는 검열은 늪지와 같다. 한 번 발을 들이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으므로. 설화는 아주 운 나쁘게도 그런 늪지 한가운데서 태어났을 뿐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에 검열을 끝없이 반복하고 더욱 깊이 빠져든다. 그 누구보다도 햇살을 닮은 모습을 하고는 그 누구보다도 깊은 심연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한 폐인이 되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에 만난 설화의 오랜 친우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 삶은 온전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했으며...
20살도 채 되기 전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가을에 남아있던 미약한 온기는 전부 얼어붙었고, 하늘에서는 다시 눈이 내린다. 찬 바람이 불어와 뺨을 두드려 발갛게 물들였고, 녹음 담긴 검은 머리카락을 잔뜩 흩트려놓는다. 긴 치맛자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린다. 눈꽃이 피어나는 계절이건만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서 그저 추락할 뿐인 것을 눈에 담는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는 차디찬 겨울날 속에서 하염없이 흔들린다. 누구보다도 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건만 한겨울 속에 홀로 서있는 것은 지독한 운명이려니 싶었다.
설화는 부채를 들고 춤을 추듯 발걸음을 옮긴다. 발자국에서 봄내음이 퍼지고, 차게 얼어가는 것을 녹이는 따뜻함이 육신을 감싼다.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한 재능은 설화가 풍기는 미약한 봄내음처럼 하릴없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였으나 굳건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젠가 설화가 끊임없는 자기 검열의 늪에서 빠져나오길 기다리면서. 이 기나긴 겨울이 다 지나가길 바라면서. 하지만 아직은 겨울이었고, 이 잔혹한 계절에 불어오는 바람은 육신마저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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