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넘실거린다. 하얀 파도꽃이 산산이 조각나 사라진다. 그것은 한때의 슬픔 같기도 했고 길게 이어진 절망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삶은 온통 비애였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리.
"..."
아리아는 깊은 바이올렛이 만연한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본다. 검붉은 것이 바닥에 퍼져있고, 가냘프게 숨 쉬던 사람 몇은 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난도질되어 죽어있었다. 그 사이에서 한 사람만이 서있었다. 본래의 태양빛을 가리듯 검게 칠한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어 내린 사람은 올곧게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시선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걸음을 옮겨 꿋꿋하게 서있는 사람의 곁으로 다가간다. 아리아 님. 그 목소리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준다.
"손수건이 더러워집니다."
"이럴 때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조금은 슬픈 미소가 얼굴 위에 떠오른다. 올곧고 부드러운 눈 안에는 짓고 있는 미소만큼이나 짙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왜 그리 슬퍼하십니까. 당신이 사람을 죽이는 게 슬퍼서요. 언노운은 아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오직 아리아뿐이었고, 그런 아리아를 해치려던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의 어디에 슬퍼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아리아는 언노운의 기색을 어렵지 않게 읽어낸다.
"저는 당신이 그들을 죽이지 않길 바라요."
"아리아 님을 뒤쫓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신을 괴롭게 할 사람들이었어요."
사실 아리아에게는 복수할 명분은 충분했다. 자신의 가족들, 나아가 동족들을 마구잡이로 해치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실험체와 같은 이를 잡아보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이 없었다. 아리아는 그들을 혐오했으나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복수심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증오로 살아가는 것은 지나치게 자기 소모적이고 자기혐오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마구잡이로 죽인다면... 이미 죽어버린 가족들을 떳떳하게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복수는 그 자리에서 끝난 것이다. 아리아는 깊어진 눈을 하고 생각했고, 언노운은 아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전에 아리아가 여러 번 한 말들이었기 때문인 탓이다.
"아리아 님, 당신은 그저 당신대로 살아주면 됩니다. 그들과 같아지는 건 저뿐입니다."
"언노운, 언노운의 행동에 정말 제 책임이 없을까요?"
파란 하늘 아래 시린 바람이 불어와 긴 머리칼을 다 흩트려놓는다. 무엇보다도 그 풍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건만 그 삶은 지나치게 가혹해서, 언노운은 그런 아리아를 동정했다.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사람이었고 그 다정함에 짓눌려가는 것이 못내 마음이 쓰였다. 당신을 멋대로 동정한 제 잘못이겠죠. 그러니 살아만 달라고.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가 무겁다. 아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해사하게도 웃었다. 저는 잘 살아있는걸요. 걱정 마세요.
아리아는 작은 바람을 가진다. 언젠가, 증오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기를.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그리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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