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리시안셔스는 문득 과거의 일을 떠올린다.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온 그 순간. 어린 날의 헬렌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혼자였다. 그때 느꼈던 슬픔은 말로 다할 수도 없었다. 너무 외롭고 슬펐다. 시간이 지나며 그러한 외로움은 사라져 갔지만, 어느 순간에는 문득 그런 외로움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과거의 흔적은 잊으려 하면 떠올라 자꾸만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헬렌의 시선 끝에 머무른 아이는 너무 작았다. 그렇게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저보다도 더. 아무런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고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무서워하지 않도록. 아이는 그런 헬렌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온다.
"... 저기."
"네, 블리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 안 찾아오셔도... 괜찮아요. 귀찮게... 하지 않을 수 있어요."
블리드는 처음으로 마주한 친절이 너무 낯설었다. 고작 12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아무리 강렬한 회복마법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주렁주렁 매달고 말을 건넸다. 낯설지만 싫지 않은 친절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귀찮게 하면 버려질지도 몰랐다. 투기장에서 숱하게 봐온 일들이었다. 귀찮다고, 쓸모없다고 팔아넘겨진 사람들. 다시 그렇게 될까 봐. 헬렌은 블리드의 앞에 몸을 숙여 앉고 시선을 맞추었다.
"전혀 귀찮지 않아요. 오히려 매일 오지 못해서 미안한걸요. 혹시 걱정했나요?"
"저는...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말도 헬렌 님이랑... 한 님... 한테만, 하는걸요."
괜찮아요. 지금은 너무 낯설어서 그런 거니까요.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아요. 몸의 상처도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에 난 상처는 더 그래요.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한 일이에요. 블리드는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낯선 친절함이 어딘가를 간지럽게 하는 기분이었다. 헬렌이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똑똑한 아이였으니까. 헬렌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황금빛의 마법을 흘려보낸다. 주변에는 맑은 빛무리로 가득 찼다. 블리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리카락 사이로, 상처 사이로 치유의 힘이 가득 흘러든다. 몸이 아프지 않을 수도 있구나. 맑은 보랏빛의 눈이 옅은 빛무리에 빛나다가 이내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친절함이 낯설어 피하면서도 온전히 피하지 못하는 모습이 어린 시절 제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헬렌은 계속 그 순간을 곱씹었다. 답지 않게 넋을 놓고 있는 일이 많았다. 그동안 온갖 것을 다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모습은... 깊은 생각을 이어가다가 누군가가 헬렌의 찌푸려진 얼굴을 톡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오는 것도 모르고 표정을 구기고 있어?"
"... 메리, 언제 왔어요?"
"그리 오래되진 않았는데, 노크하는 소리도 못 들었나 보네."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의자 하나를 끌어와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헬렌은 잠시 고민하는 듯 시선을 굴린다. 고요함에 마치 숨이라도 멈춘 것처럼.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일주일 전에, 투기장에 갔었어요. 투기장? 의외의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을 듣곤 눈을 깜빡인다. 그런 것을 즐길 사람은 아니었으니 일 때문에 간 것이겠지.
"마물을 키우고 있더군요."
"마물을 키우는 건 중범죄잖아. 설마, 아니지?"
"흔히 볼 일 없는 것과 전투노예들을 한 곳에 두어서, 서로 사냥하는 것을 놀음으로 즐긴 거죠."
그중에는 아이도 있었어요. 눈부시도록 들이차는 햇살을 압살 하는 듯한 정적이 흐른다. 메리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다가 긴 한숨을 내쉰다. 지금 내 표정이 아까의 네 표정과 비슷할 거야. 헬렌은 조용한 긍정을 표했다. 아이의 상태는 전쟁터 한복판에조차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심각했다. 숙련된 치유사가 몇 번에 걸쳐 치료하지 않았다면 심각한 후유증을 떠안고 살아가야만 했을 테니까. 대성당에서 지내고 있어요.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해서. 아이가 원한다면 그곳에서 계속 지내게 될 것 같아요. 정 걱정된다면 가 보라 덧붙인다. 워낙 경계심이 심해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말도 함께.
메리는 며칠 후 혼자 걸음을 옮긴다. 대성당. 원래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다. 신앙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기댈 곳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린아이의 외로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쉽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원해야만 다가갈 수 있는 일이었으니...
"혹시 찾으시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그, 최근에 친구가 이곳에 자주 오는 것 같아서요. 궁금증에..."
젠장, 왜 거짓말이 튀어나온 거지.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근 며칠간 헬렌은 이곳에 꾸준히 들렀었고... 말을 듣던 성직자는 상냥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가 편히 둘러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쉬곤 내부를 둘러본다. 대성당은 상처 많은 아이가 지내기에 나쁜 곳은 아니었다. 늘 치유사제가 있었고, 돌발 상황이 생긴다면 그것을 수습할 기사도 있었다.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의 끝에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단발쯤 되는 군청색 머리카락의 밑단에는 보랏빛을 물들인 것처럼 곱게 반짝였고, 몸의 주위에는 황금색 신성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 신성에도 새겨진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 것 같은 모습까지. 아이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이후로도 며칠에 한 번씩 꾸준히 찾아갔다. 하지만 늘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아이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몇 달째 그럴듯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늘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다 보면 기회가 생기겠거니 싶었다.
"..."
블리드는 대성당의 뒤편 무덤가에 자주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우연히라도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도망치듯 빠져나와 숨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것은 두려움인지, 혹은 다른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무섭니? 그림자 속에 있는 정령이 말을 건네온다. 아이는 긍정했다. 무섭다고. 처음 맛본 친절이 사라질까 봐. 다시 버려질까 봐. 하늘은 희망처럼 푸르렀으나 발 붙이고 있는 이 차디찬 땅은 가혹해서. 몸을 웅크리고 앉은 아이의 곁에 아이가 사역한 정령들이 떠돈다. 아이야, 아가야, 나의 친구. 너는 버려지지 않아. 너에게 있는 친절은 절대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어떤 마음은 길게 이어져. 영원에 가까이 존재할 수 있어. 혹은 죽어 없어져서 영원해지기도 해. 우리는 모두 너의 부모와 계약을 맺은 정령이고, 그들은 너를 사랑해서 우리를 너에게 남긴 거야. 그것은 영원한 거야. 네가 죽음의 안식에 들 때까지 영원히...
"... 다른 사람도 그럴까?"
다른 사람도, 나를 좋아해 줄까? 정말 버려지지 않을까? 정령들은 아이의 곁을 떠돈다. 당연하다고. 그러니 한 번 믿어보라고. 너를 찾아오는 태양빛의 사람을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고. ... 다시 만나게 되면, 먼저 인사해도 괜찮을까? 아주 좋아할 거야. 밤이 되기 전까지, 그들이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줄게. 아이는 고요히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는 그런 긴 이야기를 들으며 작은 다짐을 했다. 다시 찾아올 친절함 앞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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