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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 로그

오로지 상처뿐인 곳에서.

by @Zena__aneZ 2024. 8. 25.

트리거 워닝: 전투노예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가혹행위, 상해, 살해
 
이 글은 전부 가상의 현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상기 명시된 소재는 현실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며, 일어난다고 하면 비극적인 일입니다. 글쓴이는 이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위와 같은 일을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첫 기억의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아이가 세상을 인식할 때부터, 그러니 의식을 가진 순간부터 본 곳은 좁은 감옥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 위생적이지 않은, 오염이라도 된 것만 같은 식수와 딱딱한 빵이나 차가운 스프가 식사가 제공되는 곳. 그것이라도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제공되는 식사를 받아먹고, 어떤 시간이 되면 무거운 문이 열린다. 눈앞에는 무거운 날붙이가 떨어진다.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저 날붙이를 집어 들었고,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원형 경기장에 서서 앞을 바라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형 경기장을 내려다본다. 살아남아라, 그런 차가운 음성을 듣는다면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살아남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으나 본능은 알고 있었다. 사람들을 위한 유희거리가 되어라... 아이는 날붙이를 억세게 붙든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으나 아이는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있었다. 간단하다. 들고, 찌르면 되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붉은 것이 터져 나오고, 온몸이 넝마가 되어도 원형 경기장에서 내려오면 목 뒤에 새겨진 낙인이 반짝이고 상처가 낫는다. 이것이 무슨 행위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저 시켰으니까, 그대로 행할 뿐이었다.
그 아이는 특별했다. 전투본능이 뛰어났고 감이 좋았다. 야생동물의 감각을 그대로 심어놓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군청색과 보라색이 섞여든 긴 머리카락은 마치 동물의 갈기처럼 보였고, 그 사이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은 맹수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유희거리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윤리적인 문제도 거론되지 않았던 것은 이미 그 집단은 철저하게 썩어 들어간 사회였다는 뜻이 될 테다. 사람들은 볼 것을 원했고, 이름도 없는 아이는 볼 것이 되어 모두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
 
주어지는 무기는 늘 달랐다. 어떤 날에는 작은 단검이었고, 어떤 날에는 다루기도 힘들 정도의 큰 낫이었다. 가끔 활이나 석궁 같은 것이 있기도 했다. 작은 손도끼 같은 것을 잡는다. 이번에 상대하는 것은 조금 다른 마물이었다. 날카로운 것이 다닥다닥 붙은... 아이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끼를 양손으로 꾹 잡고 뛰어들었다. 날카로운 가시를 쳐내고 핵을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줄기와 같은 것에 발목이 옭아매져 그대로 잡혀 들렸다. 마물의 번들거리는 눈과 마주치고, 머지않아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오른쪽 눈에 그대로 날카로운 것이 박혔다. 몸이 힘없이 떨어졌다. 불타는 것만 같은 고통이 엄습했지만 똑같은 명령조의 말이 들렸다. 살아남아라. 살아남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익숙해서. 기어이 도끼를 들고 기어가듯 일어나 도끼로 마물의 몸통을 찍어 눌렀다. 마물의 몸체를 전부 짓이기고 나서야 도끼를 떨어트렸다. 아이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다만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것은 분명 비참함이었다. 그것뿐이었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생이었다.
 
"... 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둡고 축축한 방의 안이었다. 눈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방에 있는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본다면, 눈에는 갈라진 듯한 상처가 생겨 있었다. 원형 경기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떠올려본다.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마족의 힘을 가진 것이었을까? 아이는 마물과 마족의 차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족의 힘을 머금은 마물까지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제 고작 12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아무런 의지도 없이 있었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아이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지저분하고 뻗친 머리카락을 잡아 내리곤 눈을 가린다. 어차피 시각에 의존해 싸우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몸에 깃든 사령의 힘은 아이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살아남았다. 혹은 몇 주였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 아파."
 
아이는 느릿하게 말을 읊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알려준 말이었다.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아이는 이게 어떤 감각인지 알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진다. 아이는 엉망진창이 된 원형 경기장을 바라본다. 수많은 마물이 탈출해 아수라장이 된 곳에는 지독한 피냄새만이 진동했다. 그중 한 마물이 앞으로 다가왔고, 아이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본다.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면 마물이 보기 좋게 갈라진다. 황금빛무리가 작은 몸을 감싼다. 끔찍한 상처로 뒤덮인 몸이 나아진다. 나아진다? 아이는 주저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키가 아주 컸던 한 사람이 몸을 낮춘다. 괜찮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괜찮냐고? 무엇에 대한? 아이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말을 못 하니?"
 
"... 아니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많이, 하지 않아서."
 
아이는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은 숨을 삼켰다. 아직 작은 몸에 상처가 너무 많아서.
한은 헬렌과 함께 일을 하러 온 참이었다. 둘은 제법 잘 맞는 파트너였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제법 어려운 일도 쉽게 해낼 수 있었다. 둘은 의뢰를 받았다. 지난 5년간 원형 경기장에서 전투노예와 마물을 이용해 돈을 버는 집단이 있으니 그것을 정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말을 내뱉는 놈의 멱살을 잡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5년간 손을 놓고 있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으니까. 이제 와서 수습하는 것은 평판을 우려해서 일을 맡긴 거겠지. 여기에서 일을 받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헬렌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마물이 움직이고 있다고. 지금 조용히 방벽을 펼쳤지만 이대로는... 결국 영주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원형 경기장 내부는 처참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다친 이들 중에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한이 마물을 잡는 사이에 헬렌이 빠르게 주변에 복구마법을 걸어 사람들을 구조했다. 비명소리가 너무 많이 들렸다. 한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물 하나를 보았고, 그대로 검으로 마물을 갈라냈다. 그리고 거의 죽어가던 아이를 찾은 것은 그리 오래 걸린 일이 아니었다.
상처가 너무 많았다. 숙련된 치유사가 아니었다면 살릴 수도 없을 정도로. 아무리 치유술을 써도 상처가 전부 낫지 않는다. 그 순간에도 다른 이들의 비명이 들렸기에 헬렌은 먼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한은 아이의 앞에 앉아 퍽 다정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괜찮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만 같은 아이의 말에 어디에선가 치미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이름이 뭐야?"
 
"이름...? 그게, 뭔데요?"
 
아, 이런. 한은 한숨을 깊게 삼켰다. 아이의 앞에서 보일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는 해야 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여기에서 어떻게 불리냐고. 아이는 불린 적 없었다.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눈을 끔뻑였다. 불리지 않았어요. 그리하여 이름도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불리지 않을 자였으니 이름 정도는 없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한은 그런 아이의 눈을 바라본다. 한이 잘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체념, 회한, 비참함. 고작 어린아이가 담기에는 버거운 것들.
 
"없, 어요. 부를 사람이... 없어서요. 없어도, 상관... 없지 않을까요?"
 
"내가 너를 부를 수 없어서 곤란해."
 
이제는 상관있지? 그리 말하며 언젠가 지었던 웃음을 지어본다. 다정한 사람을 닮은 미소였다. 아이는 그것을 보곤 이상한 마음을 느꼈다. 일평생 따뜻함이라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으나 그것이 분명 온기라는 것을 알았다. 문득, 어딘가 간지러웠다. 상처가 나아갈 때 느껴졌던 감각이 왜 지금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은 마치 공허한 하늘 속에서 빛나는 별과 같아서. 문득 보석이 떠올랐다. 하늘을 담은 듯한 보석이었다. 블리드... 블리드 샤. 그런 이름은 어때?  보석의 이름도 꼭 그런 이름이었는데. 공허한 하늘의 별이 아니라 언젠가는 찬란하게 빛났으면 했다. 너무나도 가혹한 삶을 산 아이의 내일은 조금 평온했으면 했다. 아이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블리드. 블리드 샤. 누군가의 온기가 처음 닿은 것이 느껴져 너무나도 낯설었지만 마냥 싫지도 않았다.
한은 아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아이가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상태였다. 온몸이 넝마가 되도록... 아이의 얼굴에서는 기묘한 열감까지 느껴졌다. 이후 상황 수습을 끝낸 뒤 혼자서 영주를 다시 찾아가야겠군. 속으로 이를 으득였다.
 
"한! 아이는-"
 
"당신이 치유해 준 덕분에 무사해. 그런데, 얼굴이..."
 
"... 아가야, 잠시 얼굴을 봐도 괜찮을까?"
 
헬렌은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이는 제 머리칼을 손으로 꾹 눌러 잡고 있다가 조심히 머리카락을 치웠다. 오른쪽 눈 위에는 크게 갈라지고 찢어진 듯한 균열이 남아 있었다. 헬렌은 조심히 황금빛을 흘려보낸다. 남아있던 마물의 힘을 빼고 독소를 제거했으나 완전히 고칠 수는 없었다. 상처를 입은 직후에 치료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방치된 지 너무 오래되었다. 최소 몇 주는 방치한 모양이에요. 조용히 말을 건넨다. 아이는 상처가 치료되자 맹렬한 피로를 느꼈다. 그동안 긴장했던 것이 풀려버린 것만 같았다. 한은 낯선 손길로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너를 해치지 않으니 쉬라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다정함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간다. 아이는 짧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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