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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예상치 못한 만남.

by @Zena__aneZ 2024. 8. 28.

중앙지역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특별한 수업을 한다. 서로 학년이 다른 두 학생이 무언가를 함께 배우거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른바 멘토-멘티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불러왔기 때문에 꾸준히 시행되는 일이었다. 플론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당연히 멘토-멘티가 있었고, 플론은 어느 부분에서나 우수한 학생으로 평가받는 것에 더해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도 잘 해냈다. 플론은 늘 멘토의 역할로 다른 학생과 페어를 맺었다.

 

"안녕하세요, 플론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루비...라고 해요."

 

이름 그대로 붉은 보석 같은 머리칼과 반짝이는 사과의 농익은 색을 담아낸 눈이 인상적이었다. 자신감은 조금 없어 보였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플론은 잠시 상대를 바라보다 곱게, 혹은 맑게 웃었다. 긴장할 것 전혀 없어요, 저도 평범한 학생인걸요. 루비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늘 학생 연설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범한 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플론은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잠시 멋쩍게 웃다가 조심히 권유했다. 그렇다면, 잠시 걸을래요? 그러면서 앞으로 어떤 것을 할지 얘기 나눠봐요. 긴장도 풀 겸 해서요.

 

"혹시 좋아하는 것 있어요?"

 

"좋아하는 거, 글쎄요..."

 

그리 뜨겁지 않은 햇살 아래서 걷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루비는 잠시 고민했다. 좋아하는 것. 특별히 좋아한다고 할만한 게 있나? 짧은 고민의 끝에 어떤 말이 튀어나온다. 가족... 가족이요? 아, 네. 그러니까... 삼촌이랑 꽤 친한 편이거든요. 다른 가족이랑은... 그렇게 안 친한데. 플론은 그 말을 듣고는 웃으며 말했다. 저랑 비슷하네요, 저도 다른 가족들이랑은 영 별로인데, 동생이랑 엄청 친해요.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꼭 잘 빚어놓은 것만 같은 사람의 미소가 처음으로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의 표정은 저런 모습이구나. 그런 모습이야말로 정말 평범한 학생처럼 보였다. 묘하게 굳어있던 분위기가 풀린다.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말을 나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도. 플론은 늘 멘토로 있을 때 어딘가에 불편함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멘토-멘티 시간마다 만나 함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이따금 같이 체육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공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었다. 자신을 구성하는 것, 지금까지 느껴온 것, 그리고 지독한 삶의 염증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여겼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의 편견이었다는 것처럼.

 

"플론 선배, 오늘... 시간 괜찮으면 제 집에 놀러 올래요?"

 

"갑자기 놀러 가도 괜찮아?"

 

"집에 삼촌이 있긴 한데... 괜찮을 거예요. 부모님은 바쁘신 편이라서..."

 

"그래, 그럼 놀러 가는 김에 저번에 못했던 스터디도 마무리하자."

 

선배는 공부하는 거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가?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걸어간다.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을 했는지. 깊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가벼운 이야기를 더욱 많이 했다. 삶의 염증에 대한 것보다도 더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이니까. 플론은 루비가 말했던 가족에 대해 궁금했다. 좋은 사람. 강인한 사람. 하지만 어딘가, 다친 것만 같은 사람. 그것이 몸을 뜻하는지 마음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지레짐작하는 것은 명백히 실례되는 행동이었으니까. 다만 아직 어른이 아닌 이들은 어른들보다 어떤 것을 더 잘 꿰뚫어 보곤 했다. 그것은 숨기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어, 조카~ 왔어?"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는 첫인상이 완전히 망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플론은 잠시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굴린다. 죽 늘어진 술병과 반쯤 열린 창문, 얇게 흔들리는 커튼. 두 명 중 한 명은 루비와 비슷했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느긋하게 흔들린다. 플론은 루비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을 똑같이 느낀다. 보석 같은 붉은 머리칼과 사과의 농익은 색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눈은 굉장히 아름다웠고, 그것은 다른 사소한 것 -이를테면 엉망인 분위기나 당장의 상황 같은- 을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했다. 빈 술병이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조심히 집어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어이쿠, 굳이 주워주지 않아도 됐는데. 고마워라. 플론은 그의 미소에 기묘한 어둠이 깔렸다고 생각했다. 꼭 처음 마주했던 루비의 표정처럼. 그리고 그것은 어딘가 한 구석에서 어떤 것을 만들어냈다. 불쾌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하지만 지나치는 거슬림이라고 하기에는 묵직한 기묘한 감상. 플론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둠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다른 종류의 어둠을 가진 사람이니까.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아~, 걱정하지 마.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 고마워, 조카 친구?"

 

루비는 제 삼촌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한 뒤 빈 술병을 치운다. 그 말은 조금 신경질적이기도 했고, 나무라는 것 같기도 했고, 걱정인 것 같기도 했다. 아이러니하다. 이런 상황에서야 정말로 어딘가 놓은 듯 가벼워지는 모습을 본다는 게. 루비, 스터디는 나중에 하자. 가족분 손님도 있으신 것 같은데, 난 이만 돌아갈게. 그린 듯한 고운 미소를 지어 보이곤 가벼운 인사를 하곤 집을 나섰다. 루비가 뒤따라 나왔다.

 

"선배, 혹시 실망한 건 아니죠? 막,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제 삼촌이 저래 보여도 정말 좋은 사람인데..."

 

"오해하지 않았어, 걱정 마."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네가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 말을 기어이 삼켜버리고 밝게 웃었다. 내일 보자, 그 말을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다. 나도 내 동생과 있으면 그렇게 편해 보일까. 동생이 유독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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