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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안개 가득한 곳은.

by @Zena__aneZ 2024. 8. 28.

지금 이 상황을 간단히 세 마디로 표현하자면, '망했다'에 가까웠다. 그것을 그나마 풀어서 말하면 '남의 충고를 제대로 새기지 않고 걸음을 들여 큰일이 났다'이고. 숲에 안개가 자욱해질 때는 걸음을 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으나 심각하게 여긴 것 또한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W는 한숨을 흘린다. 눈이 있었다면 질끈 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부야 워낙 비밀이 많고 밝혀지지 않은 것도 많았으나 안개가 자욱한 숲만큼은 정말 익숙해질 일이 없었다. 아무리 동부를 오래 오간 사람이라고 해도 길을 잃기 십상인데 무슨 생각으로 발을 들인 건지. 무엇을 어찌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분명 마을의 어르신이라면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을 쉬이 허락하실 분이 아니셨으니. 눈총이야 조금 받을지도 모르겠다만.
문득 주변을 둘러본다. 안개가 짙어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제 것이 아닌 작은 발자국 소리도 들렸으나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굳이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곳에는 유독 혼이 많았다. 특히나 어린 혼이라면 더더욱. 영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나 피부로 느껴지는 슬픔을 모르기에는 그가 겪어온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좋으면서도 애석한 일이었다.
 
"귀하신 분, 길을 잃으셨나요?"
 
문득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빛바랜 녹색의 머리카락과 흐려진 붉은 눈, 수의처럼 하얀 옷은 현실감 없이 흔들렸다. W는 온갖 상처를 매달고 있는 그 자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 빛바랜 색채가 머금은 목소리가 지나치게도 따뜻해서인 까닭일 테다. 마을의 어르신을 만나러 왔네. 평이하게 내뱉은 언어에 여상한 미소는 조금 더 짙은 온기를 머금었다. 이제 막 스물을 넘은 것처럼 보이는 이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흘리고는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평소 같았다면 쉬이 따라가지 않겠으나 이번만큼은 괜찮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래 살다 보면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혼은 W의 오랜 추억을 생각나게 했다.
사실 같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머금고 있는 색채도, 표정도...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딱 하나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의 오랜 친우도 죽는 그 순간에 아주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뿐이었는데. 누군가를 떠올리고 계시나요?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군."
 
"눈치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서요."
 
"... 그래, 오래된 추억이 생각나서."
 
"그 추억과 제가 닮았나요?"
 
"모든 것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닮았어. 어떠한 모습이 말일세."
 
앞으로 나아가던 걸음이 조금 느려지나 결코 멈추진 않는다. 그래. 그런 모습이 닮았다. 기어이 멈추지 않는 그것이. 아주 깊고, 깊은 것으로 살아낸 그 강인한 모습이. 아마도 내 원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설원에 내던져진 몸은 혹독하게도 차가웠고, 끝에서야 덥혀진 생을 살았다며 기어이 마음 놓고 눈을 감아버린 그 모습이 못내 마음이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잊은 적 없다. 그리움도, 원망도, 그 이외의 모든 것마저도. 답지 않은 감상에 빠진 것은 이 짙은 안개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가장 솔직해지곤 하니까. 언어로 내뱉지 않은 감정이 축축한 안갯속에 녹아든다. 녹음 가득 머금은 혼은 아주 잠시 걸음을 멈추곤 살짝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삶은 축복이지요.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답니다. 귀인의 친우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닮았다. 아무것도 닮지 않았으나, 그 강인함만큼은. 그래서 더 생각이 났다. 타인을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다 강해서. 그것이 애석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혼은 안개의 끝자락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W는 안개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전히 벗어나기 전, 혼은 자그마한 말을 건넸다. 그 아이와 친히 지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늘 어린아이라서요. 해사하고 맑은 미소와 깊은 인사를 남기고 다시 안개 자욱한 숲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따뜻함 어린 목소리는 안개에 가려져 사라진다. 그 모습을 눈에 담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서부로 돌아간 뒤에는 오랜만에 찾아가야겠네. 그런 생각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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