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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가장 밝게 빛나는.

by @Zena__aneZ 2024. 9. 22.

촛불은 꺼지기 전 가장 찬란하게 타오른다. 그렇게 긴 꼬리를 그리며 황홀하게 타오르는 유성우가 되어...
 


 
 
세실리아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들이킨 숨에서는 피냄새와 다른 비릿한 향이 느껴졌다. 조금은 미끌거리는 감각도 함께 느껴졌다. 그것이 피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다른 것에서 비롯된 감각인지 알 수 없었다. 흑색 밤하늘보다도 어두운 검은 눈이 뻑뻑한 듯 애써 깜빡인다. 죽은 사람이 몇인지, 산 사람이 몇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시체를 먹는 마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도망갔겠구나. 이곳에 남은 건 나와 몇명의 사람밖에 없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세실리아는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원하리라는 목적도 없다. 자신이 특별한 구원자라는 선민의식도 없었다. 그는 평범한 치유사였고 사제였다. 황혼의 어둠을 담아낸 피부와 새빨간 석양을 닮은 머리카락, 밤하늘을 담은 검은 눈은 신비로우면서도 묘하게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겨서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보일 뿐이었다. 본질은 같았다. 두려움을 아는 사람. 다만, 그 두려움을 이겨낼 정도로 강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 말이다. 세실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철퇴를 강하게 쥔다.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일어난다.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놀란 듯한 눈길로 그를 쳐다본다. 세실리아는 언제나 후방이었다. 실력 좋은 치유사를 앞으로 내보낼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특히나 전투 능력으로는 조금 떨어지는 치유사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망쳤고, 정말 최소한의 인원만 이곳에 남아 있었다. 세실리아는 이 상황이 기꺼웠다. 치유사로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인지 누군가의 죽음이 한없이 무뎌지다가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한없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가장 앞에 서보고 싶었다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말을 들은 이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그 말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 알고 있어서.
 
"빛을 부를 거예요. 아마 생명력까지 소모할 정도로 강하게요."
 
치유사는 통보하듯 말한다. 더 이상 누군가가 죽는 건 보기 싫었다.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희생하길 택했다. 그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흔한 원망의 말도 없었다. 세실리아는 수많은 마수의 앞에, 악마의 앞에 선다. 철퇴를 높이 치켜들었다. 마법 주문을 읊는다. 작은 구체가 만들어지고, 곧이어 넓게 확장된다. 모든 구역을 집어삼킨다. 황홀한 연한 노란빛과 강렬한 푸른빛이 핏빛 균열을 가득 채운다. 목 안쪽까지 타들어가는 감각에도 영창을 멈추지 않았다. 빛 한 점 없던 검은 눈이 황금 이채로 반짝였다. 어떤 불꽃은 꺼지기 직전에 가장 찬란하게 타오른다.
희생을 파먹고 살아가는 이들은 문득 빛 앞에서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은 떠난 자의 몫이 아니다. 모든 감정은 오직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가장 밝게 빛나 타오른 자여, 당신이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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