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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끝나지 않는 악몽.

by @Zena__aneZ 2024. 9. 25.

잠시 눈을 감기만 해도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의 피와 비명소리, 끔찍한 나약함으로부터 기어올라오던 참극. 한껏 찌푸린 표정으로 감았던 눈을 뜬다. 한낮의 푸름을 닮았던 눈은 이제 탁한 하늘의 색을 띤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책상 위를 더듬는다. 작고 반짝이는 유리병을 집어들어 그대로 마개를 열어 무색무취의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는다. 도로 의자에 기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진다. 수면제에 취해 잠에 든다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깨어있을 때는 환상통이 함께하고 잠들어있을 때는 악몽이 함께하는 가련한 사람아. 그는 긴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쨍한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한껏 찌푸린 표정이 겨우 펴진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림에 고개를 잠시 흔들었다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래봤자 잔뜩 갈라진 목에서 정상적인 소리가 나올 리는 없었지만. 들어와.

"상태가 더 안좋아지셨네요, A."

"... 나비상인. 누가 당신을 들여보냈지?"

"힘을 조금 썼죠."

"완성됐나? 그 약."

"일단 이것부터. 그나마 덜 중요한 물건부터 확인하세요."

책상 위에 작은 상자를 올려 놓는다. 상자 안에는 깊은 새벽에 그가 먹었던 것과 같은 수면제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나비상인은 그의 반응을 보다가 곧 독특한 푸른 빛이 일렁이는 작은 병을 책상 위에 올려둔다. 당신이 처음 왔을 때 구매하려고 했던 약이에요. 성공 확률은? 100%. 그는 손을 뻗어 약병을 집어든다. 손끝이 잘게 떨린다. 나비상인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성공한다고 해도 바로 깨어날 수는 없어요.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앞으로 그만큼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그는 그 말을 듣고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시간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소중한 가족이 눈을 뜨지 못한 것이 20년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은 자는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확실한 가능성 뿐이었으니.

"드디어 밤이 평온하겠네요."

"그래. 그렇겠지. 이 기나긴 악몽이 끝나는 날이 머지 않았어."

"내 빚도 다 갚은 거고요."

나비상인이 깊게 웃는다. 그는 그 웃음을 본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이후에도 늘 그렇게 웃었던 자였다. 딱 한 순간, 죽을 뻔했을 때. 그때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나 죽음의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격렬한 분노였지. 이용하려는 사람과 지키려고 하는 사람 중 살아남는 것은 늘 이용하려는 사람이었으니... 이것은 그 수렁에서 꺼내준 보답이라고.

"내 빚이고, 내 죽은 형제의 빚이죠. 그러니 내가 갚는 게 마땅하지 않겠어요? 그때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렸으니, 이번에는 내가 살리는 거예요."

"그것도 벌써 17년... 아니, 18년 전인가. 갚을 필요 없었다고 말했는데."

"빚지고 살 성격은 못 되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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