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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열어보지 않은 편지.

by @Zena__aneZ 2024. 10. 4.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할지 오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평범한 인사를 써버리고 말았네요.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을 때쯤에는 제가 그곳에 없겠죠.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이라면 내 편지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어떠한 필연적인 과정을 겪을 때, 그것을 말로 다 이루기 힘든 순간에 뜯어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혹시 이 편지를 뜯어보지 않고 버린 건 아니죠? 그렇다면 조금 서운하겠지만... 뭐, 어떡해요. 당신은 내 기대에 보답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나는 이 편지를 당신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기에는 밤이에요. 구슬 같은 동그란 보름달이 높게 떠 있어요. 눈가에 자라난 꽃잎 때문에 조금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이 풍경을 담아내는 데에는 거대한 어려움은 없네요. 다른 이야기도 해볼까요? 나는 다 지나가 흩어져버릴 밤의 공기를 좋아해요. 이건 이제 제가 맡을 수 있는 유일한 향기를 가지고 있거든요. 아직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죠. 난 이 모든 게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어루만질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고... 무언가를 추억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까지요. 마음이라는 건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아주 강렬하게 살아갈 힘을 줘요. 덕분에 죽음이 지척에 있어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마음은 아름다운 만큼 잔인하지만, 또 그만큼 강렬한 흔적을 남겨요. 당신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나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있죠, 가끔은 숨을 쉬는 게 힘들어요. 제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간다는 증거겠죠. 죽음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곤 해요. 그렇게 본다면,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알 수 없는 일이에요.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겠죠. 그 누구도 죽음을 겪어보고 살아나지 않았으니까요. 나도 두려워요. 아주 가끔은 그 두려움에 몸서리치기도 하고요. 하지만 나는 이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거예요. 죽음을 손이 뻗으면 닿을 거리에 두고 있을 순간까지 그러겠죠. 나는 그럼에도 삶을 사랑하거든요. 지독하게도요. 삶의 빛과 죽음의 그림자는 정답게 손을 맞잡고 있으니, 두렵더라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절망하거나 무너졌나요? 가끔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에도 벅차서 외면했나요?
 
무너지거나 외면해도 돼요. 절망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그저 굳세게만 살아가려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까요. 그저 어쩌다 보니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살아가는 거니까요. 슬픔이나 분노를 눌러 담을 필요는 없어요. 담아두기만 해서는 녹슬고 말아요. 다만 어쩔 수 없이 살아가다가 아주 외로워진다면, 무언가를 견딜 수 없어진다면... 그때는 내 흔적을 찾아봐도 괜찮아요. 나는 제법 괜찮은 책을 많이 썼어서, 그 안에서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내 편지를 늦게 읽을 수도 있으니까, 여기에만 써놓을게요.
살아내는 것은 지옥과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럼에도 이 세상은 고통만이 있지 않으니, 희망은 나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좋은 거죠. 그리고 좋은 것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는,
나는...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은 순간도 없었어요. 언제나, 늘 괜찮았어요.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았거든요. 죽음이 지척에 있어도, 한때는 절망했어도, 언젠가는 두려워 견딜 수 없었어도... 괜찮았어요.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많이 있거든요. 그중에 당신도 포함되었다고 하면 믿어줄 건가요? 하하, 어쨌든요. 내 삶은 아주 좋았어요. 행복했고요. 내 삶은 축복으로 가득했어요. 그러니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어요. 살면서 많은 것을 얻어간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 육신만 가진 채 홀로 왔으니, 이제는 육신을 버리고 홀로 돌아갈 차례인 거예요. 그래도 내 영혼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으니 다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슬퍼질 날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워질 날에, 머지않아 나에게 찾아올 적막함이 당신에게도 찾아오게 된다면... 이 편지가 당신의 쓸쓸함을 덜어낼 수 있기를 바라요. 위로가 되길 바라고요.

나의 삶은 축복이었어요. 당신의 삶도 그러길 바랄게요.
 
안녕히, 나의 친구.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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