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땅의 바람은 여전히 혹독했다. 숨 한 번을 내쉴 때마다 생이 한 움큼씩 사라져만 가는 착각이 번져 나간다. 한때는 웃음소리가 번졌을 땅, 또 언젠가는 비명소리만이 만연했을 이 땅 위에는 소름 끼치는 고요함만이 머물렀다. 끔찍하게도.
눈앞에 보이는 자는 한때 사랑했던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좋은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정 반대의 위치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묘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한숨마저 묻혀 사라질 허연 눈밭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띤 자였다. 이렇게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라고 해야겠구나. 더 이상 그녀를 닮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는 소름 끼치기만 했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기나긴 전투의 마침표를 찍으려 했을 뿐.
작은 입김이 흘러나온다. 기실은 눈 결정 섞인 한숨일 뿐이었으나, 마치 그 육신이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감상할 틈도 없이 하얀 폭풍이 몰아친다. 높이 뻗은 손에서 푸른빛의 선이 뻗어 나와 땅을 뒤흔든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러한 마법을 쓴 적이 없다. 그저 불쾌함만이 커진다. 그것은 한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어쩌면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일 수도 있었다. 다만 같은 선에 서있던 자의 눈은 강렬한 녹색을 품고 있었으니, 시리도록 푸르게 얼어붙은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망설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망설이지 말라는 소리 없는 언어였나? 이미 떠나 없어진 자의 자비였던가? 혹은, 끝까지 그것을 죽이려고 발악했던 흔적이었나? 이 중에서 가장 강했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이었구나. 입가에 비웃음인지 무엇인지 모를 미소가 번진다. 검을 맞대고 있던 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어떠한 말소리 대신 총성 몇 발이 들려온다. 견고하게 얼어붙은 신체 위에 자그마한 상흔이 생긴다. 차가운 얼음 결정이 눈이 굴러가듯 느릿하게 W를 향했다.
"그녀는 너처럼 싸우지 않았어."
처음으로 꺼낸 말에 있지도 않은 입이 온통 쓰린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릴리가 어떻게 싸움을 이어갔는지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저도 모르게 과거의 방식대로 움직이다가 주춤거리는 경우도 많았고, 직접적인 공격을 망설여 크게 다칠뻔한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 상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밖에 없었다. 죄책감인지 책임감인지, 혹은 그 외의 다른 것인지. 공중에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생겨 마법을 파훼해 나간다.
"서포트할게. 마법은 충분히 파훼할 수 있어. 보호술도... 어느 정도는."
"... 부탁하지."
가볍게 시선을 주고받은 이들은 이 끈질긴 전투를 이어간다. 그것은 한때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악몽이 된 추억이었다. 죽은 자의 육신을 차지한 마수는 입을 벌린다. 마수의 몸, 한때는 다정함으로 가득했던 몸이 천천히 무너진다. 이해할 수 없어. '그녀'는 왜 너희들을 살린 걸까. 인간이란 상처밖에 모르는 존재인데. 사실 신이었던 적도 없던 자를 신으로 떠받드는 쓸모없는 것들을 왜 살렸을까. 대답할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는 무지함으로,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누군가는 도망침으로 외면했던 질문은 상실의 슬픔보다 짙어서. 왜 살렸는가. 다정했던 자여. 당신은 왜 우리 모두를 살렸는가. 영영 해답을 잃어버린 질문은 침묵이 감돌았고, 머지않아 총성만이 들렸다.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핵을 파괴했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어. 마치 다정하지 않고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은 악몽일까?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상실의 바람이 또다시 모든 것을 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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