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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필요에 의한.

by @Zena__aneZ 2024. 10. 2.

바닥에 구두가 닿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걸음소리를 내었다. 타오르는 보라색 하늘을 담은 자는 황금색 눈을 느릿하게 굴린다. 이내 시선 안에 담기는 자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어 팔짱을 낀다. 가볍고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얼굴은 한 치의 의심도 할 수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에르, 오래 기다렸어? 다정한 목소리가 옅게 흐른다. 이름이 불린 이도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긴 머리칼을 조심히 넘겨주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루벨. 오래 기다렸다고 해도 괜찮았을 거고요."

 

"다행이네. 그런데... 같이 있던 분은?"

 

루벨라이트의 시선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시선의 끝에 머무른 사람은 멋쩍은 듯 짧게 기침하고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또 다른 사람이 붙은 거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에 당신은 오는 길동안 괜찮았냐는 말이 돌아온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루벨도 아름다우니까요. 영광인데. 하지만 입맞춤은 들어가서 할까? 그게 편하다면 얼마든지. 열차의 객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간다. 문에 붙은 작은 창을 커튼으로 가리고 나면 다정한 듯 지었던 웃음, 부드러운 분위기와 같은 것들이 씻어 내려가듯 사라진다.

 

"오렌스. 지난번에 하던 일은 잘 마무리됐어요?"

 

"처음에는 좀 위태롭긴 했는데, 잘 마무리됐어. 에르모소, 당신은?"

 

그것도 아무런 문제 없이 마무리됐어요. 다행이네. 루벨라이트는 객실 내부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어느덧 열차가 출발하고 창밖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했다. 둘은 나름 합이 잘 맞는 비즈니스 파트너였고 오랜 친구였다. 서로의 상황을 알았기에 연인 행세도 기꺼이 해주었고, 때로는 날카로운 조언을 주고받기도 했다. 창밖의 풍경만을 바라보다 루벨라이트가 입을 먼저 열었다. 당연히 사업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번에 하려는 사업 말인데. 당신도 함께 하지 않을래? 에르모소는 잠시 시선을 굴렸다. 고민하는 모양에 조금 더 가까웠다.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말에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는 대답을 내어 놓는다. 좋은 능력 썩혀서 어디에 쓸 거냐는 핀잔에 가까운 말을 했으나 듣는 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속 편하기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머리를 객실 소파에 기댄다. 또 잠을 못 잤어요? 일이 많아. 보이지 않게 해야 해서 더 피곤해.

 

"조금 자요.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그동안 다른 사람이라도 오면 어떡하려고?"

 

"문을 잠그면 되는 일 아니겠어요."

 

"다른 소문이 나도 나는 모르는 일이야."

 

루벨라이트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널찍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흐드러진다. 은 귀걸이가 조명을 받아 정신 사납게 반짝거린다. 누군가가 본다면 지나치게 매혹적이라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행히도 이 공간에는 에르모소밖에 없었고, 방금 문을 걸어 잠근 탓에 누가 들어올 일도 없었다. 잘 자요. 루벨라이트는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로 잠을 청했다. 한참을 못 잔 탓에 느릿한 숨소리만 들렸고, 에르모소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여러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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