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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黃昏과 Halloween

by @Zena__aneZ 2024. 10. 26.

언니! 그 부름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은 굉장히 이른 시간이었거니와, 달아람은 누군가가 저를 깨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만히 누운 채로 고개만 슬쩍 돌리니, 슬그머니 열린 창문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가벼운 한숨을 쉬곤 몸을 일으킨다.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긴 뒤에 겉옷 하나만 대충 걸치고 창가로 간다. 창틀을 두드리고 차오르는 바람이 매섭다. 언제 또 이렇게 가을이 성큼 다가왔는지.

"언니, 오늘 남부에 가지 않을래?"

"결론부터 말하는 그 화법은 어떻게 못 하겠냐?"

"에~이.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창틀에 몸을 기대서 생글생글 웃는 낯을 가만히 보다가 이마를 한 번 쥐어박는다. 악! 아픈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곤 집 안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화장실로 향했고, 다려는 그것을 보곤 활짝 웃었다.
달아람은 젖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털어내다 마법으로 대충 머리를 말린다. 다려는 그것을 바라보다 가지고 온 상자 하나를 내민다. 언니, 이거 입어봐. 상자를 열어보니 다려가 입은 옷과 비슷한 디자인의, 하지만 확연히 다른- 짙은 녹색을 띤 철릭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웬 새 옷? 그냥, 문득 가을이구나 싶어서. 게다가 오늘은 할로윈이잖아. 달아람은 침묵을 지키다가 녹색 철릭을 입어본다. 익숙하지 않은 새 옷 냄새가 났다.

"잘 어울린다, 언니."

"... 가자. 너도 새 옷 하나 사줄게."

달아람은 제 옷매무새를 두어 번 다듬고는 다려의 손을 잡곤 집에서 나선다. 다려는 그런 온기가 싫지 않았다. 괜히 소리 내어 웃어 보이곤 손을 더 꼭 잡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어렸을 때 생각난다. 달아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남부의 바람은 습하고 따뜻했다. 가을의 시작과 같은 날씨. 아직 더위가 전부 가시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둘 다 더위도, 추위도 쉽게 타지 않는 체질이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늘 갓을 쓰고 다니는 다려는 수상하다며 몇 번 잡히기도 했지만 가지고 있던 용병 배지 덕분에 잘 벗어났다. 이러려고 딴 용병 배지라며 웃는 모습을 보곤 속없다며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지. 길거리에 주렁주렁 달린 장식들이 축제의 분위기를 살린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사탕 하나를 받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려의 손에 사탕을 쥐여주고 난 뒤에는 일찍부터 문을 연 가게로 향했다.
일찍이 문을 연 가게도, 문을 열 준비를 하는 가게도 활기로 가득 차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반기는 것 그 자체로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반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할로윈은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날이니까. 한참 다른 생각을 하다가 시선을 돌린다. 시선 안에는 짙은 청록색 옷을 걸친 동생이 보인다. 맑은 청록색의 머리카락과 그것보다 더 짙은 녹색 깃든 눈이 잘 어울린다. 생각해 본다면, 다려가 처음부터 갓을 쓰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다. 필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어느덧 깊어진 눈빛을 깔끔하게 지우곤 손수건 하나도 같이 동생에게 쥐여준다.
 
"얼마 전에 손수건 찢어졌다면서."
 
하얀 손수건에 청색 실로 수 놓인 것. 다려는 손수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갓을 쓰고는 옷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는다. 거리 좀 둘러보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 말에 긍정의 대답을 내놓고 함께 걸었다. 나누는 이야기는 평범했다. 무엇을 하며 지냈고, 어떻게 지냈고, 또 내일은 무얼 할 건지. 언젠가는 하지 못했던, 또 언젠가는 간절히 바라던... 일상이라는 것에 언제 이렇게 익숙해졌는지. 활기가 가득한 거리는 문득 낯선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은 상냥하면서도 잔인하여, 자꾸만 헤매게 되는 것이다. 온통 헤맬 수밖에 없는 거리의 사이에서 익숙함을 찾아 시선을 돌린다면, 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 아."

시선의 끝에 머무른 자의 모습을 눈에 담은 달아람은 짧은소리를 흘리곤 걸음을 옮긴다. 시선이 머물렀던 이도 그를 보곤 고운 웃음을 지어 보였고, 다려도 그것을 보고 눈치 좋게 갓을 슬 벗는다. 우연이네, 루시아. 그러게요. 축제에 놀러 오신 건가요? 음... 동생 녀석이랑... ... 놀러 왔지. 언니, 그 침묵 뭐야? 불퉁한 말끝에는 또 웃음소리가 흐른다. 초면이지? 바람다려라고 한다네! 다려라고 부르면 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권유한다. 어차피 밥은 언니가 사줄 거라는 농담 섞인 말도 함께. 또 일상적인 말이 흐른다. 달아람과 바람다려에게 있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시의 음식, 루시아에게 있어 고향의 음식은 나쁘지 않았고 딱 좋은 정도였다. 우연히 만난 셋은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느릿하게, 한적하게, 여유롭게. 한때는 상상도 못 했을 걸음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시의, 고향의 축제에서는 알 수 없는 그리운 향기가 났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은 언니가 지어줬어."

"아람 씨가요?"

"그럼! 다른 동생의 이름도 언니가 지어줬는걸. 그리고 우리는 언니의 이름을 지어줬고~."

"원래는 하늘아람이었는데, 부담스럽다고 하니 달이라고 하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그래서 달아람이 된 거야."

"그럼... 다른 동생분의 이름은요?"

"별솔아. 예쁜 이름이지?"

하늘과 바람과 별... 이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셋이 익숙한 존재들. 그리하여 한 편의 시가 되었을 셋은 이제 둘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이와 함께 서서 세 명으로 있으니 이것도 어떤 운명일까 싶었다. 달아람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낯선 길가에 스친 익숙한 모습. 망자의 날 Halloween의 어스름한 시간黃昏은 생과 사의 교차점이라.

"아람 씨?"

"아,...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별일이네, 언니. 그렇게 넋을 놓고."

별일이라는 것은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슬픈 날보다 슬프지 않은 날이 더 많아졌다. 함께인 날보다 따로인 날이 더 많아졌다. 그러니 괜찮은 것이다. 온 별이 다 저물어도 하늘과 바람이 여전하여, 이 시도 영원할 테다. 빈자리는 그저 그대로 있고, 그 공허함은 다른 이와의 추억으로 덮일 것이 분명하다. 할로윈의 황혼이 타오른다. 육신 잃은 그림자가 드디어 안심한 듯, 하염없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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