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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서부에서의 답신.

by @Zena__aneZ 2024. 11. 4.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비밀번호: 241103




내 친구이자 멘토, K에게.

안녕하세요, K.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쓰려고 종이를 펼친 참이에요. 사실 이전의 편지를 보내고 많이 후회했어요. 당신이 북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호기심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책을 완성해야겠다는 열의도 함께요.
일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북부에 대한 책을 쓰고 있어요. 바로 얼마 전에 남부에 대한 책을 다 쓴 참이거든요. 책을 한 권 동봉해요.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자연에 대한 찬미, 긴 겨울의 웅장함, 신과 신성에 대한 특별함보다도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싶었어요. 그 모든 일들 말이에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북부에 대해 알려달라고요. 읽으면서 꽤 놀랐어요. 그런 참극이 있다는 막연한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눈에 글자를 담아보니 더욱 확실히 와닿아서요. 불씨의 냄새도, 죽음의 공포도 명확히 알고 있어서 더욱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해 주어서 고마워요. 당신의 일부를 보여준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내가 활자로 써 내려갈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적어 내리면서도 이제는 괜찮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편지를 다 읽고 덮었을 때 비로소 그 감각이 물살처럼 밀려오더랍니다. 마치 얼어붙지 않는 바다처럼, 산산이 부서져 생기는 흰 포말처럼요. 이제는 괜찮다. 괜찮겠다... 그래서 저도 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당신은 늘 내가 말하길 기다려주었으니까요. 그것에 대해서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제 고향은 남부입니다. 늘 햇살이 뜨겁게 일렁이는 곳이에요. 파란 지붕과 흰색 지붕이 이리저리 얽혀 있어요. 저는 가족은 없었지만, 친구들과 제법 행복하게 같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제 고향도 당신의 고향처럼 그리 좋았던 곳은 아닙니다. 사람으로 인해, 같은 사람이 괴로운 곳이죠. 이따금 불길이 일어났어요. 어쩔 때는 폭음이 들려요. 이 후덥지근한 길목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순간도 있습니다. 북부에서는 침묵이 만연하다면, 남부에서는 굉음이 만연합니다. 시끄러운 소리 사이로 모두가 침묵한다는 아이러니가 대단해요. 나는 그런 아이러니 한가운데에서 머물렀어요. 결국 그 소음과 침묵의 아이러니를 견디지 못하고 친구들과 함께 남부에서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그렇게 서부에 도착했습니다. 서부는 남부보다도 훨씬 서늘해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습니다. K,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적응력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니까요.

서부에 정착하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북부에 잠시 들렀어요. 서부의 최소 몇 배로 춥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북부의 추위에서 남부를 엿보고 말았어요. 온통 하얀 눈이 햇살을 머금은 것에서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를 느꼈어요. 이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그 아이러니가 계속 떠오릅니다. 어쩌면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그 비극을 제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살짝 엿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이 삶이 폭풍이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요. 우리는 각자의 폭풍 속에서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졌죠. 하지만 지금은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게 아니라, 폭풍의 끝자락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겠다, 이 이야기를 묻지 않고 쏟아내야만 한다, 두려워도 꺼내놓을 수 있다는... 언어로 다 표현하기 힘든 막연한 감각 속에 놓여 있어요. 우리의 삶에 폭풍이 다 지나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새로운 폭풍이 오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괜찮아질 거예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혹은 당신이 그런 것처럼요.
K. 나는 아직도 문득문득 과거의 그 순간을 떠올려요. 내 삶의 폭풍을 원망하고 있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것들을 전부 죽이겠다고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화가 난 채였는데, 언젠가부터 분노에 온 시간을 쏟아붓지 않게 됐어요. 평생 증오하리라 여겼는데 더 이상은 그러지 않네요. 분노가 나를 갉아먹는다는 당신의 조언을 늘 떠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분노를 멀리하게 됐고요. 나의 오랜 친구이자 멘토. 그것에 대한 감사인사를 이제야 전하는 나를 용서해요.

언젠가의 미래에 말이에요, 우리가 나누었던 편지를 다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폭풍이 관통하던 삶의 일부를 되새겨도 더 이상 눈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폭풍을 증오하는 데에 온 생애를 할애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좋겠어요. 그 순간이 우리는 비로소 폭풍을 벗어나게 되는 거라고요. 그게 안 된다면... 뭐, 어쩌겠어요.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일 거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일 거예요.

나의 오랜 친구. 지금 서부에는 드물게도 비가 와요. 북부에는 눈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남부를 떠나는 날에도 이렇게 비가 왔어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처럼 비참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아요. 그래요. 내 삶은, 이제 꽤 괜찮아요. 당신도 그러길 바랄게요.

당신의 친구, J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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