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물의 소굴이라고 들었으나 그저 마물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족으로 보이는 자도 있었는데, 대체 사전 조사를 얼마나 허술하게 한 거지? 게다가 마물들은 계속 독까지 뿌려댔다. 포르투나. 이 독, 계속 정화할 수 있어요? 치유 마법을 몸에 건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누적되는 피로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충분히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오자 고개를 주억이곤 검의 손잡이를 꾹 쥔다. 검의 손잡이 위로 순백색의 빛무리가 일렁이며 칼날을 만든다. 손 안에서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늘 잡아온 무기에서는 들뜨지도, 그렇다고 가라앉지도 않은 평이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검을 유연하게 휘두른다. 가볍게, 마치 산책하는 듯한 걸음이었다. 위로 치고 올리고, 대각선으로 그어 내리는 동작으로 물 흐르듯 이어진다. 독기가 가득했지만 숨을 쉬는 것이 편했다. 포르투나가 완전히 안전하다는 뜻이겠지. 다행이었다. 그는 늘 혼자 다니는 것을 편하게 여겼으나 이런 곳에 올 때는 외부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불현듯 숨이 막힌다. 급히 치유마법을 쓰고 주변을 둘러본다. 독기가 더 짙어졌나?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문득 깨달았다. 아, 여기는...
공간 자체가 마기에 침식되어 정신체에 교묘하게 간섭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젠장, 나도 간섭당했구나. 어쩌면 사전 답사를 한 사람들도 당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그는 치유마법으로 독소에 오염되는 몸을 끊임없이 치유한다. 독소가 훨씬 더 짙다. 소모되는 힘이 너무나도 많아. 포르투나, 내 말 들려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으득인다. 그는 당장 치유마법으로 버티고 있지만 포르투나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이대로면 버틸 수 없다. 검으로 남은 마물을 가른다. 숨이 찬다. 이 공간의 핵을 찾아야만 했지만, 아니, 일단은...
"라일락 씨."
아, 무슨 악담인지. 왜 하필 이런 순간에 동생이 떠오른 걸까. 그는 숨을 한 번 내뱉곤 포르투나의 곁으로 간다. 가만히 손을 뻗는다. 어느덧 풀려버린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넘겨준다. 황금색 빛무리가 흐른다. 포르투나가 그의 손을 억세게 붙든다. 익숙한 눈빛이 보였다. 포르투나의 몸에 깃든 마계의 악의. 하지만 그는 다른 것을 엿본다. 동생이 던지던 의문과, 손을 더 잡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꼬여버린 실타래를 평생 풀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막연함 같은 것. 짧은 손톱이 손목의 살을 파고든다. 목 위에 손이 포개어진다. 그는, 라일락은 온갖 빛깔이 어지럽게 얽힌 포르투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황금빛무리가 다시 흐른다. 정신 착란 증상이 녹아내린다. 라, 라일락 씨... 그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린다.
포르투나는 손안에 머무른 온기를 느낀다. 질척하고, 더럽다. 정신이 까맣게 암전 되었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도 안 됐다. 그럴 이유도 없고. 정신이 점차 흐려져갈 때, 라일락은 손을 뻗어 포르투나를 품에 끌어들인다. 몸이 차갑다. 그 사이 독소가 가득 쌓인 것이 분명했다.
"죄, 죄송해요. 저,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알고 있어요, 울지 않아도 돼요. 이 공간, 생각보다 위험하더라고요."
목덜미에 손자국이 있다. 그는 벗고 있던 후드를 뒤집어썼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괜찮다는 것처럼. 포르투나를 여전히 품에 끌어들인 채로. 포르투나는 익숙한 꽃내음을 가진 자의 품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상대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도 무엇도 아닌 것이었다. 마치, 라일락이, 아주 먼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다독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 한 과거에 머무르는 존재를 도닥인다는... 기묘한 감각이. 하지만 괜찮다며 하염없이 토닥이는 행동이 너무나도 라일락다워서 눈도, 입도 굳게 닫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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