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집이라는 것은... 편한 곳.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괴롭지 않고, 거리낌도 없는... 그렇다면 나에게 집이라는 곳이 존재하나? 아니, 애초에 있긴 했었나? 자조적이고 자기 학대적인 질문이다. 은설화는 흔한 슬픔조차 없는, 아무것도 담지 못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초목색의 눈으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쓸모없는 물건들을 본다. 반쯤 불타고 남은 책. 제법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것처럼 보여서 그랬나? 어차피 은설화는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 소중한 것을 절대 가문 안에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았다. 애초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거의 없었고...
"소월아."
"네, 아가씨."
오래전부터 함께한 호위무사는 설화의 곁에 선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월은 설화만을 지켰다. 처음에는 가문의 큰 어른에게 거두어져 어린 아가씨의 호위 겸 대화상대로 있었다. 처음에, 소월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적절한 사람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소월이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상황을 이해했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집안의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명성을 잘 쌓아놔서 겉으로는 제법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다 썩어 문드러져있었다. 그런 고귀한 명예가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끊임없이 갉아먹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지옥 같은 집안에서 설화만이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척을 했다. 마음이랄 것이 다 곪아 썩어버렸으나 멀쩡해 보였다. 어떻게 그런 상처를 달고도 괜찮은 척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지 않나? 제법 가까이 두고 소중하게 여긴 것이 찢어발겨지고 타들어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런 사소한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표정이 안 좋아. 괜찮니?
"... 누가 아가씨의 방을 뒤지고 물건을 태웠는지 찾아낼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 누가 했는지 알고 있거든."
나는 그런 사소한 일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다. 설화가 짓는 부드러운 웃음은 소월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어쩌면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소월은 고개를 주억였다. 설화의 웃음을 보면, 소월은 자꾸만 언어를 잃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웃음이라서, 그런 이유보다는... 설화의 웃음은 금방이라도 날아가 흩어질 것처럼 가벼웠기 때문이다. 유쾌한 것을 본 것은 아니니, 그래, 그럼... 함께 나가서 산책을 할까. 이곳은 너무 답답하잖아.
설화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소월은 머뭇거리다 조심히 손을 포개어 잡았다. 손을 가볍게 맞잡고 바깥으로 나갔다. 온통 서늘하던 손에 온기가 번져가는 것이 좋았다. 집 안에 있는 것보다 이 온기가 주는 위안이 더 거대했다. 그러니 설화에게 있어 돌아갈 곳은 오래도록 같이 지내온 소월밖에 없는 것이다. 소월도 분명 비슷한- 혹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고.
바깥에 나가서는 평소처럼 걸었다. 손의 온기는 여전했다. 둘은 바깥을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정처 없이,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좁고, 잘 맞지도 않는 세상에서 살아내고 있는지 엿본 이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다.
"소월아, 전에 쓰던 머리끈 끊어지지 않았니? 하나 더 줄까?"
"주신다면 감사히..."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다른 상인이 말을 건넨다. 혹시 정인이냐는 질문. 소월이 질문을 던진 상대를 조용히 노려본다. 노려보는 행동이나 눈빛이 제법 귀엽기도 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상대가 졸도할 것만 같아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곤 말을 새로이 잇는다. 제 호위무사예요. 사과와 함께 장식용 끈을 받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늦을 때까지 걷다가, 문득 뒤돌아본다. 머리를 계속 풀고 다녔구나. 정리해 줄 테니까 뒤돌아봐. 그 말에 군말 없이 뒤돈다. 눈송이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손안에 담는다. 처음부터 이 빛깔이 인상적이었다. 빙공을 쓰는 저보다도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돌아갈 곳은 네가 있는 곳이야."
아, 주변에 온통 온기가 머무른다. 무게 없는 말이 불꽃보다도 따뜻하다. 겨울에 잘못 피어난 새싹을 닮은 자는 그저 웃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말이냐는 질문에 절대 아니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는 드문드문 떨어진 문장이 되돌아온다. 그것을 전부 듣고는 또 환하게 웃었다. 소중한 것이 없는 곳에서 이런 안온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밤이 깊어간다.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마음의 그림자는 깊어져만 간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빛나는 것은 또렷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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