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모호해서, 쉽게 혼동하곤 한다. 혹은 영원한 것은 없으니 아주 길고, 길게 늘어져서 뒤섞이고 만다고... 그러니 그리움과 원망은 아주 가깝게, 정답게 부둥켜안고 있으니 하나를 품게 된다면 다른 하나도 가지고 마는 것이다. 헬렌 리시안셔스는 그리움을 느낄 상대도, 원망을 느낄 상대도 없었기 때문에 둘을 더 쉽게 혼동했다. 어쩌면 둘 다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야, 그럴 것이 아닌가? 가장 원하던 순간에, 가장 원하던 가족이라는 존재에게서 떨어져 나왔으니... 사실은 그리움보다도 원망이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온전히 원망하기에는 헬렌 리시안셔스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다정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다정함이 가족에게도 적용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 가족이 더 이상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는, 헬렌 리시안셔스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코끝에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향기가 스친다. 그 향기를 알고 있다. 잡초 사이에 피어난 들풀을 마구잡이로 섞어놓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인상적인 향기를 품은 사람은 몇 없으니까. 손을 뻗는다. 희고 길게 뻗은 손이 누군가의 로브를 우악스럽게 붙든다. 별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멍한 표정이 다채롭게 바뀐다. 놀람, 그리움, 슬픔, 분노, 원망... 절박함을 닮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표정마저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라일락."
살아있었어? 그 질문을 토해내듯 내뱉는다. 이채가 어른거리는 황금 눈동자가 매섭게 빛난다. 눈가가 옅게 떨린다. 진작에 집을 나가 있었으니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했다. 단호했지만 애정이 깃든, 그럼에도 매정한. 왜 찾아오지 않았어, 살아있었으면, 어떻게든 살아있었으면... 헬렌 리시안셔스는 이것이 억지인 것을 알았다. 라일락이 살아있었을 때 왜 헬렌을 찾아오지 않은 건지, 그리고 이 눈물에 어떤 의미가 있든지... 리시안셔스라는 성씨를 버린 순간부터, 라일락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헬렌 리시안셔스라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은 순전히 라일락이 품고 있던 다정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안해라는 대답이 돌아온 순간 서늘하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황금색 눈동자에 웃음도, 울음도 아닌 감정이 실렸다.
"만나면, 정말 반가울 줄 알았어. 언니가... 당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쁠 줄 알았어."
"헬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말 하지 마. 나는 가족 같지도 않은 그 사람들이 나를 버리기 전까지 있었으니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라일락이 지금껏 살아있었다면, 한 번쯤은 찾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죽은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서, 드디어 만나서 하는 말이 고작 미안해라니. 차라리 보고 싶었다고 했다면 조금 더 나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마주하지 않았을 뿐이라서 그런 허울 좋은 착각을 했던 것뿐이었다. 슬픔이나 원망 따위가 서늘하게 내려앉은 얼굴마저도 희게 빛나서, 그러한 절망이 잘 어울렸다. 애석하게도. 안쓰럽게도... 헬렌은 라일락을 붙잡던 손을 놓았다. 라일락은 손을 뻗으려다 로브 안쪽으로 손을 숨기고 말았다. 원망스럽다는 말에 이해한다는 말이 되돌아온다. 헬렌은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했다. 이렇게까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얕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사실은 이렇게 원망스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다 지난 일이니까. 어째서 이토록 속이 울렁거리는지 알 길도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헬렌의 발걸음이 먼저 그 공간을 떠났다. 이전과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이 황혼 녘의 색이 헬렌 리시안셔스와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오래전, 라일락 리시안셔스가 떠나던 날이 라일락과 완벽하게 잘 어울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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