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는 남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부의 따스한 햇살이 빚어놓은 것만 같던 사람이었으나 남부의 소란과 침묵을 생각하노라면 그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도 없었다. 연화는 다정함을 알았고, 사랑을 알았으며, 아낌을 알았다. 그것과 함께 피와 폭력을 알았으니, 부당함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그의 적성에 꼭 맞았으리라. 맑은 밀색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것이 느껴진다. 시원스럽게 흐드러진 것이 꽃잎 같더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아이들. 심장을 가득 채우는 꽃내음. 사랑들아, 이리로 와. 애정 한 움큼 집어넣은 모든 말이 화사했다. 어린아이들을 품에 가득 끌어안고 웃는 모습은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손에 닿는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한껏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며 웃는 것이 마치 동화에나 나올법한 천사와 어린아이들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영원하면 좋았을 것을. 아니, 영원하지 않더라고 하더라도... 이 행복이 이렇게 빨리 끝날 필요는 없지 않던가? 순간이 무한히 겹쳐져 만들어지는 것이 영원일 텐데, 무한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순간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오래도록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어깨 부상을 입었던 것을 원망한 적은 없다. 발목 한쪽을 이제는 더 이상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 슬펐던 적도 없었다. 그야, 모든 것은 연화의 선택이었으니까. 연화의 선택이 아닌 것이 없었다.
"..."
"대표님, 만약에 제가 잘못된다고 하면... 우리 아이들 좀 들여다봐주세요."
사람 인생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 말을 하며 지었던 어설픈 미소에는 원망 한 점 없었다. 어깨의 부상도, 발목의 부상도 전부 남부의 용병단원으로, 세간에선 혁명단이라 부르는 일을 하다가 생긴 상처였다. 남부 소속 용병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결단코 그랬다. 하지만 사랑한 사람을 잃은 것은 너무나도 슬펐다. 그와 동시에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를? 남부를. 어쩌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죽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시체를 수습할 수는 있었겠지. 시체 없는 장례식이라니. 그러니까 연화가 후회하는 것은 왜 조금 더 강하지 못했나, 하는 마음뿐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해답 없는 물음만이 파도친다. 연화는 슬픔을 끌어안고 웃기로 다짐했다. 이 슬픔을 어루만지자고. 영원할 수는 없으니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슬픔을 어루만지자.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이들만큼은 지켜야 했으니까. 반드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 나는 죽을 수 없어."
어깨가 욱신거렸다. 발목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에서 대낫을 놓지 않았다. 밀빛 머리카락이 피로 축축해졌다. 그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눈이 시리도록 반짝거린다. 마치 밤의 장막을 거두는 태양의 빛깔처럼.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다. 본능만이 남은 몸을 움직인다. 손에 들린 대낫을 휘두른다. 서슬 퍼런 낫의 궤적이 하얗게 빛난다. 연화는 전투 지도자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에 앞서,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공부도 잘했다. 아주 낯선 문제를 마주해도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싶었어.
어쩌면 용병이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를 아이들에게 무기를 다루는 법도 알려주고 싶었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 무엇이든 가르쳐주고 싶었어.
10대에는 사춘기가 찾아온다더라. 엄마는 사춘기를 잘 몰라. 그때는 가족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래서, 그러니까...
투정부릴 상대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속이 들끓는다. 피부가 너무나도 뜨거운데, 온기는 사라져 가서. 춥다. 남부의 여름밤이 너무나도 추웠다. 상처가 자꾸만 벌어졌다. 하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자고 있었다. 이 혹독한 여름날에, 아이들의 온기를 지키고 싶었다. 오래전 쓰던 대낫이 부러진다. 달빛조차 그들의 악행이 부끄러워 몸을 숨긴다. 연화는 마지막 숨을 뱉어내고, 온전히 허물어지고 만다.
"너희들을 오롯이 사랑으로 키우고 싶었어..."
눈물이 났다. 투명하고 깨끗한 물방울이 얼굴을 말갛게 씻어내었다. 파란 눈이 흐릿하게 빛난다. 사랑아, 사랑들아. 연화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사랑을 가득 넘겨준 사랑들의 얼굴이... 정말,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밤이 저물었다. 혹독한 아침이 찾아왔고, 연화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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