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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찬란한 저주.

by @Zena__aneZ 2025. 1. 19.

명은 살아남았다. 상처 가득한 육신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정신을 끌어안은 채로 살아남았다. 옛적부터 운이 좋은 사람이었으니 스스로를 잃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도 되는지, 살아남아 얻은 고통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하는지, 애초에 보상을 해줄 이가 존재하긴 하는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엄습한다. 몸의 안쪽에선 온갖 날카로운 주술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심장을 쥐어뜯기는 감각, 바람을 타고 저만치 밀려나는 감각 따위가 사고를 마비시킨다. 주술의 삿된 기운이 자꾸만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 몸 이곳저곳에 멍이 들었다. 이따금 피를 토하기도 했다. 속이 찢어발겨진 감각이 매 순간 밀려든다. 애써 정신을 붙들고 있노라면, 또 어설픈 감각이 손끝에 스쳐 지나간다. 하염없이 하늘을 향하던 적벽옥 빛의 눈이 다른 곳을 향했다. 하늘이 옥빛으로 물든다. 찬 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 타오르는 녹음을 머금은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길게 물결쳤다. 뺨에 새겨진 상처가 서서히 나아간다.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통증이 약해진다. 이제는 하얗지 않은 옷자락이 흔들린다. 상처와 흉터로 얼룩진 것이 바람에 씻겨 내려간다. 너무 오랜 시간을 버틴 탓에 아픈 줄도 몰랐던 작은 상처들까지 전부. 몸에 지독한 상흔을 남기던 힘은 모순적이게도 이 상흔을 지운다. 다시 상처로 얼룩지고, 또다시 나아지며...

"... 아프지 않아, 괜찮아."

얼굴 위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픔으로 얼룩져 홀로 있을 때에는 무표정밖에 지을 수 없던 사람이었으나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들을 바라볼 때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제는 혼만이 남은 아이의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괜스레 서러웠다. 곧 팔을 뻗어 아이를,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이제는 정말 괜찮아. 정말이야. 그러니까 무얼 하든,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머물러도 괜찮고 떠나도 괜찮으니까... 있고 싶은 곳에 있으면서 행복하기만 해. 아이들은 명의 품에 꼭 안겨 조잘조잘 떠들다가 곧 어딘가로 간다. 그 작은 영혼들은 여전히 이 땅 위에 머무른다. 명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옥색 여명이 맑게 타오르며 연푸른 하늘의 장막을 남기고 사라진다. 눈이 햇살을 받아 곱게 반짝인다.
명은 또다시 해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진다. 어째서 죽은 생명이 계속 이 땅에 남아있는가? 그것은 저주인가, 혹은 축복인가? 변질되지 않는 혼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이토록 쓰라린 영원이 또 어디에 있을까? 명은 하염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가주가 죽은 그날로부터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저주인지 축복인지 알게 될 터였다. 명은 조용히 바랐다. 이 영원성이 축복이 되기를. 저주라면 너무 슬플 것만 같아서...
발에 수풀이 닿는다.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면 또 걱정할 텐데.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보면 언제나 신발이 없었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하염없이 떠돌고 마는 것이다. 새벽에 홀로 산책을 나왔던 것을 모를 텐데. 명은 걸음을 옮긴다. 발끝에 닿는 수풀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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