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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연교

그리움은 차가움.

by @Zena__aneZ 2025. 1. 22.

앨리스 디샤는 굉장히 냉소적인 정령이었다. 머금고 있는 색만큼은 굉장히 온화하고 따뜻했으나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냉소적인 표정은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장미를 씻어낸 물에 담가둔 것만 같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오기에는 조금 모자라고, 흰 속눈썹 안에 자리 잡은 오묘한 빛깔의 눈은 구슬처럼 반질반질 빛났다. 쉬이 다가갈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는 봄날의 따사로움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얼어붙고 마는 차가운 겨울을 닮아 있었다. 자연에서 탄생한 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매서웠고, 혼란스러우며, 다정한 만큼 매정하기도 했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앨리스를 스쳐 지나가 저 멀리 향했다. 겨울꽃 향기가 지천에 깔린다. 차갑고 고요한 향기에 피부가 따끔거릴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마치 긍정이라곤 모르는 것만 같은 냉기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듣게끔 한 말은 아니었으나,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던 자는 그러한 말에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표정의 빛깔을 기억한다. 지나치게 창백했지.
 
한때는 좋아하지 않았어?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야. 내가 믿는 사람은 없어."
 
나조차도?
 
"너조차도."

 
반질거리는 구슬 같은 눈을 느릿하게 감는다. 눈 안쪽에서 일렁이는 색채가, 기억이 어렴풋하다. 한때는 사람을 좋아했었고 무엇보다 아꼈으나, 이 어린 정령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너무나도 쉽게 나쁜 쪽으로 변질되는 생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원한 것은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쁜 방향으로 변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앨리스가 유일하게 곁에 두던 사람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사람들은 꼭 그러더라. 가끔은,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워... 다시 눈을 뜨면 눈 안쪽에 달라붙은 기억은 사라진다. 가끔은 영원히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기억이 괜히 서러워서일까. 다시는 볼 수 없는 너 때문일까. 이 희미한 기억이 처음만큼 소중하지 않은 탓인지, 처음만큼 아프지 않았던 탓인지 알 수가 없네...
눈꺼풀 안에 착색된 것이 그 반질거리는 눈알마저 물들인 듯, 습관적으로 감은 눈을 습관적으로 뜬다. 어째서 영원한 건 없을까. 어째서 처음만큼 좋거나 싫지도 않고, 그립거나 밉지도 않을까. 온갖 봄의 빛깔이 일렁이던 눈이 지나치게 적막하다. 물기 하나 없는 것이 모든 지나간 것을 어루만지는 손길처럼 삭막하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고요했다. 불현듯, 목 안쪽이 차갑다. 파란 물비늘이 돋아나는 것처럼 차가워진다. 그리움은 어쩐지 차가움이라 그런가 보다.

앨리스, 앨리스. 디샤. 그런 부름이 반가운 순간도 있었지. 손에 달라붙은 모래 알갱이 같은 고요함이 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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