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타오르던 하늘이 잿더미 속의 선명한 노랑이 되어가는 순간을 안다. 타오른다기에는 적막하던 고요 어린 노을이 단단해진 땅 위로 내려앉는다. 흰 구름이 혼처럼 떠돌았고, 평생 이름으로 부르지 못한 당신네들은 죽어서도 이름이 없었다. 여전하게도. 랑은 알면서도 침잠하는 것들의 이름을 알았다. 손에 쥐어진 기억은 데일 듯 뜨거우면서도 차갑게 식어가 이 미적지근한 피부는 노랑 속에 숨어든 어둠 탓에 화상과 동상이 오가는 것처럼 검푸르게 물들었다. 하늘의 그림자, 서서히 어두워지는 노랑이 세상을 푸르게 만든다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랑은 손에 쥐어진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름 없는 묘비 앞에 앉았다. 술잔 하나와 술병 하나를 내려두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름이 없다. 과거에서 멈춘 것은 영원히 멈춘다. 한 자리에 영원히 머무르는 감각은 언제나 영원 헤매게 만들었다. 잿더미 속의 선명한 노랑으로는 영 밝게 살아낼 수가 없어서, 중심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돌며 다시 이 무덤의 앞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왜 혼자만 살아남았는지, 왜 하나만 빼고 모두가 죽었는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이제는 신만이 알고 있을 해답을 찾고 있노라면 푸르스름한 노랑이 시야를 뒤덮었다.
"비싼 술은 못 가져왔어요."
내뱉은 말이 웅웅댄다.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가도, 납덩어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다. 비싼 술을 챙기지 않은 이유는 별 것 없다. 이제는 온통 흐려진 저편의 추억은 비싼 것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가볍고 값싼 것이 잘 어울렸다. 과거의 잔정은 비싼 것이 아니었으니까. 비싼 술로는 속을 달래지도 못하겠어서. 병뚜껑을 따는 소리가 난다. 유리와 알루미늄 뚜껑이 달각거리는 소리. 투명한 술잔 안에 그것보다도 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찰랑거린다.
걸어가는 사람은 영원히 걸어가고, 남아있는 사람은 영원히 남아있으며, 죽은 사람은 계속 죽은 채이고 산 사람은 계속 살아간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은 언제나 입안을 쓰리게 만들었다. 몸에 맞지도 않은 약을 먹은 것처럼. 잠시 시선을 든다. 고요가 가지는 유일한 소란스러움, 바람이 이 몸통을 관통한다. 삶이 이어지는 만큼 슬픔도 이어지더라. 그렇게 떠나는 사람은 영원히 떠나는 걸까.
술잔을 기울이곤 마치 건배를 하듯 높이 들었다. 하늘에 퍼진 선명한 노랑과 닮은 표정으로 무덤을 바라본다. 희미한 만큼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덮쳐온다. 너무나 그리운 시간이 있다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것이 마음의 관성인가. 하하... 알 수 있는 게 없네요. 웃음이 되지 못한 부스러기를 간식 대신 놓고 술을 들이켠다. 속에서부터 쓰린 감각이 밀려 올라온다.
"원망은 하지 않아요. 아니, 어쩌면 조금은요."
원망할지도 모르죠. 어느 저편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법은 스스로 깨우친 것이었다. 그러니 영원성의 앞에서는 솔직하고 진솔하게 늘어놓는다. 너무 과한 그리움은 원망을 불러오니까. 그러니까, 그저 그립다고. 이별은 한순간이고 기다림은 영원이라서. 어째서 그토록 떠나가기만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여전히 신조차 모르는 해답을 그린다. 어째서 죽었고, 어째서 살았는지.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노랑으로 빛나다가 푸르게 변해버린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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