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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검푸른 빛깔의 이름은 침묵

by @Zena__aneZ 2025. 1. 27.

신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수많은 경험을 한다. 그중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가끔은 그 경계가 모호해서 관념과 현실 사이를 수없이 헤매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의 늪에서 헤매는 시간이 적다고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주 헤맨다고 하기에는 그는 타인의 앞에서는 늘 웃고 있었다. 그러니 진정으로 헤매게 되는 것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을 때였다.

가게의 문을 닫는다. 문득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니까, 기시감도 미시감도 아닌 애매한 것 말이다. 신이 그 이상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면,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가게의 문은 조금 일찍 닫는 편이기도 했으니까... 아무도 없는 게 당연했는데, 가끔은 그 당연함에 언어를 잃어버리곤 했다. 반쯤 열어둔 창문에서는 주황 장밋빛 햇살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가게 안을 환하게 밝혔다. 느릿하게 감았다 뜬 눈 안에 장밋빛 햇살이 차올랐다. 맑은 빛깔이 차오른 눈이 가게 안 이곳저곳을 향한다. 황갈색 줄에 걸어놓은 하얀 석고 오너먼트에서 희미한 향이 새어 나오고, 약간 그늘진 곳에 있는 수정들은 깊이 들어오는 햇살에 찬란하게 빛난다. 벽과 바닥에 무지개 빛깔의 파편들이 수 놓인다. 하지만 햇살은 따뜻한 색을 머금고도 결코 따뜻하지 않았고, 무지개의 조각들은 날카로워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았고, 검푸른 그림자가 발을 들이밀기 시작한 바닥에서는 찬 기운이 올라왔다.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가득 담긴 붉은 눈으로 익숙한 공간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듯 바라보다가 흐트러진 물건들 앞에 선다. 물건들을 정돈하는 손길이 지나치게 적막하다. 우울이라고 하기에는 메말랐고 분노라고 하기에는 축축한 것은 이 고요한 장밋빛 햇살 속에서 투박하게 빛난다. 신은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밀려든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신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으니까. 오래도록 혼자 있었던 사람이어서, 이 세상을 천 한 겹을 덧씌워둔 것처럼 느꼈다. 이 세계에서 방출되는 듯한 감각이 심장 한편에 고인다. 어쩌면 세상에서 나를 도려내버린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의 몸은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형태도 아니면서 그런 희끄무레한 감각은 잘도 고이더라. 

 

"..."

 

창문 너머에서 햇살과 함께 바람이 밀려든다. 풍경이 움직이며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가벼운 옷자락도 흔들렸다. 이 맑은 햇살은 여전히 고요했다. 심장께가 따끔거렸다. 감각이 고이는 심장이 너무나도 약해서 그랬던 건지, 애초에 세상과 동떨어지게 태어난 탓인지.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애초에 건강하게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홀로 있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처음부터 무언가가 달랐더라면. 하지만 그런 가정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쓸모없는지 잘 알고 있었던 자는 눈을 감았다. 곧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풍경이 쉼 없이 흔들렸다. 청아하게, 하지만 정신 사납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듣기 좋은 소리였으나 홀로 들으니 그저 잡음밖에 되지 않았다. 화음과 소음의 아이러니 사이에 서있다가 창문 가까이 다가간다. 문득 눈 안으로 수많은 빛이 침투한다. 잠시 표정을 찌푸리다가 손을 뻗는다. 찬 바람이 뺨을 두드린다. 바람이 불었고, 마음도 불었다. 흘러가다가 퉁퉁 불었다. 소음과 침묵은 물과 같아서 그 안에 있노라면 온통 흘러가고 불어오고 부르튼다. 신은 창문을 닫았다. 손끝에 찬 감각이 남는다.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바람에 넘실거리던 단단한 고목색의 머리카락과 한껏 어우러져 흐드러진 술장식의 귀걸이가 곧 차분해졌다. 풍경소리가 사라진 가게 내부는 검푸른 적요함에 잠겼다.

신은 가게 안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 찢어질 듯한 적막을 견디지 못할 때쯤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상냥하게 웃고 마는 것이다. 막막하고 먹먹한 침묵이 만연한 신의 세상은 타인의 방문으로 깨어진다.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은 그 자체로 기다림이었다.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가? 이 외로움은 어디에서 불어오고, 또 어디로 불어 가는가? 이윽고 외로워지지 않을 때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만 하는가?

 

창문 위에 얹은 손이 차가워진다. 또다시 침묵이 가까워졌다. 소음이 멀어진다. 영혼조차 멀어지는 착각이 일렁거린다. 이인증이라도 온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다가 가만히 손을 떼고 커튼을 친다. 제법 따뜻해 보이던 색감으로 가득한 공간은 곧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하염없이 깊은 푸름을 들여다보다가 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이제는 검게 보이는 목제 탁상 위에 손을 얹어본다. 푸르게 녹이 슬어버린 그림자에 검어진 것은 문득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착각을 들게 했다. 잠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커튼을 제대로 친 것이 아니었는지 빛 한줄기가 내리쬔다. 언어를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은 자는 또 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간다. 빛을 향하고 있던 눈이 문득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곧 빛 한 줌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커튼을 친다. 천장과 벽에 조각나 돌아다니던 무지개는 완전히 사라졌다. 풍경이 고요하다. 차갑고 공허한 빛깔이 느려진다. 이 작은 기다림의 공간에 어둠이 찾아온다. 하염없는 밤이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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