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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자유를 이해하는 길.

by @Zena__aneZ 2025. 2. 22.

이디스는 납덩이를 올려둔 것만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상처가 너무 깊었다. 서투른 손길로 몸에 남은 깊은 상처를 두어 번 더듬어 보며 생각한다. 길어봤자 10분이다. 어쩌면 20분 정도. 이디스는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버려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분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을 알았으니까. 원망받으며 살아남는 것이 익숙했다. 명줄이 길다. 쓸데없이.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서 오래도 살아남았네...
하하, 짧은 웃음을 흘린다. 그것은 광기도 슬픔도 아닌, 지독하게도 평범한 것이었다. 어딘가 탁한 미소를 다 흘려버린다. 죽음 앞에 눈빛이 흐려진다. 이디스는 바다를 향해 걷는다. 마치 상처 하나 없고, 그것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애초에 상처투성이였음에도. 천천히, 느릿하게 걸었다. 길고 끈질긴 발걸음을 따라 피가 떨어진다. 지혈할 의지도 없었다. 살아남을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바다를 향해 걷는 이유는, 이 의미 없는 모든 생에서 유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 점차 숨 쉬는 것이 버거워진다. 이디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끈질기게 걷다가 눈에 보인 풍경을 바라본다. 아, 바다다...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하늘이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발치에 닿는 파도가 시원하다. 곧 쓰라린 감각이 밀려든다. 상처에 바닷물이 닿아 파도꽃이 되어 부서진다. 이디스는 제 손에 닿는 파도를 느낀다. 어느덧 허리까지 닿는 파도에,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것을 꺼낸다. 파란 빛깔의 메모리 스톤. 사람의 잔해가 어떻게 이런 찬란한 빛깔을 띠는지. 이디스는 곧 마지막 메모리 스톤을 손 위에서 떠나보낸다. 평생 자유를 원하던 내 동생. 이제야 너에게 자유를 쥐어 준다. 넌 자유를 좋아했고 바다를 좋아했으니까 이 바다를 평생 떠돌아. 그리고 이 물살에 다 마모되어서... 평생을 빌어 이 세상에서 떠나가라.
동생도 떠나보냈으니 이제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디스는 둔한 통증으로 떨리는 손을 본다. 곧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머지않아 익숙하면서도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선만 슬 뒤로 향한다. 익숙한 얼굴. 아... 이 끝에서 당신을 볼 줄은 몰랐는데.

"이 상황이 낯설지는 않네요. 아주 익숙하기도 하고..."

아만다는 말이 없었다. 이디스는 그런 그를 보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과묵한 건 여전하시네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없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연기처럼 흩트려트린다. 느슨하게 묶어 내린 머리카락이 다 풀려서 자유롭게 흐드러진다. 자유라. 그것만큼 이디스와 안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모든 것이 손 위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상처가 뻐근했다. 서서히 몸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파도는 세차게 밀려와, 몸에 닿아 부서져 사라진다.

"20년이 훌쩍 지났네요. 그러니까, 몇 년이더라..."

"24년 전."

"아... 맞아요, 그랬죠. 24년 전에... 동생 시체도 못 찾을 뻔했는데... 인사가 너무 늦었네. 고마웠어요."

내 동생 말이에요. 평생을 감옥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했거든요. 그랬던 동생이 예쁜 보석이 돼서 평생 여행을 하게 됐으니까...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도요. 말이 두서없이 튀어나오네. 끝까지 용서를 빌 일만 있고... 용서를 빌 염치는 있지만 받고 싶다는 염치는 없어서요. 미안했습니다. 감각이 마비되어 간다. 여전히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타버려도 상관없는 생이었다. 하지만 끝에서야 그런 생각이 들고 만다. 어쩌면, 그러니까, 정말 어쩌면... 자유라는 것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삶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삶이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았을까. 어쩌면 너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지킬 길도 있지 않았을까... 이디스는 눈을 감았다 뜬다.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잿빛 하늘과 연기 같은 바람이 옛 거장의 그림처럼 밀려들어온다. 저 앞에,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잊을 수 없는 가족의 모습. 지키고 싶었던... 체튼, 내 동생... 이디스는 인영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다. 작은 발돋움이 바다의 밑으로 사라진다. 곧 아만다의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영영 떠났다.
아만다는 지독한 병증을 느꼈다. 고작 18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의 눈물을 기억하고,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기억한다. 그 악행의 피해자로서 최선의 말을 건넨다. 편히 쉬어라. 그 말만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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