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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낯섦에 기대는.

by @Zena__aneZ 2025. 2. 25.

단단하게 감긴 붕대를 풀었다. 피부를 태울 듯 일렁거리던 상처는 어느덧 다 나아진 뒤였다. 더 이상 쓰라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익숙했다. 상처가 금방 나으니까. 사실 무언가가 금방 나아진다는 것은 저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살아남는 것이 이윽고 상처가 되는 것이다. 아리아는 숨을 뱉어버리듯 내쉰다. 알 수 없는 어딘가가, 이제는 다 나아버린 상처 따위가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발걸음이 무겁다. 걷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는 것이 오랜 습관이었다.
아리아는 누군가를 찾아간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확신은 없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다만 아리아는 위협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애달프고, 의미도 없는 삶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리아는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너무나도 쉽게 열리는 것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반평생 열어왔던 문은 지나치게 무거웠는데, 어느새 그것에 익숙해졌나 보다. 말끔한 방 내부를 가볍게 훑다가 자리에 앉았다. 이미 방 내부에 있던 이는 아리아에게 시선을 한 번 보내다가 말을 꺼낸다. 어떤 게 필요하신지. 해야 할 말을 정리하고 천천히 내뱉는다. 신분과... 지낼 공간이 필요해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랑은 시선을 슬쩍 들어 아리아를 가만히 바라본다. 신분을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나이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신분세탁을 원한다. 그러니 랑이 처음 아리아의 의뢰를 받고 이 비밀스러운 공간까지 데려오게 된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단순한 범죄자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지금의 아리아의 모습은 마치... 순간 짙은 바이올렛 빛깔의 눈과 마주한다. 마주한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마음이 느껴진다. 희끄무레한 믿음이나 미약한 불신 따위가 뒤섞여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겁에 질린 채 살아온 것만 같은 자의 눈빛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안전하게 지낼 공간은 바로 마련해 드릴 수 있습니다."

보안 면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리아는 그 말까지 들은 이후에 그나마 안심한다. 당장은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정도를 지내야 더 마음이 놓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마음을 놓기를 선택한다. 과도한 불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쉬는 게 먼저였다. 랑은 그런 아리아를 보고 같은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랫동안 공격당하며 지내온 것을 알아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춰내지 않는다.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리아에게서 랑 자신의 과거를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발 붙일 곳 하나 없이 유령처럼 있는 모습이 못내 마음이 쓰여서. 무언가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은 상처가 금방 낫는 것과 같은 궤도를 가진다. 절대 떨쳐낼 수 없다는 저주가 되고, 이윽고 무언가를 동정하게 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랑은 과거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휴식과, 안전한 공간. 오로지 혼자서 있을 시간. 그래서 아리아에게 망설임 없이 말을 건넨 것이다. 아리아는 그것이 어떤 것인 줄도 모른 채 수락했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빚을 진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타인의 친절함에 기대던 것이 너무 낯설었던 탓에. 하지만 그 낯섦이 자신을 살게 만든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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