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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재회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by @Zena__aneZ 2025. 2. 21.

이디스는 어딘가 엇나간 사람이었다. 이디스를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만 지나치게 사무적이면서, 새파란 눈은 그 무엇도 담지 못하는 것처럼 탁하게 반짝거린다. 어두운 청회색의 머리카락이 물결친다면, 마치 매캐한 연기가 흩날리는 감각마저 들었다. 데네브는 이디스를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자신의 선배인 자는 소중한 것을 잃었고, 다시는 그런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유독 몇몇 이들에게 애틋했다. 아이들, 10대의 사람들. 어떤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 그토록 스스럼없었으면서도 미성년의 이들에게는 관대했고, 그들을 살리면서도 불이익을 받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그럼에도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에게 잘 쓰이는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다. 단지 그뿐이다. 서로의 사정을 들여다봤자 좋을 것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데네브는 자신에게 그것을 들여다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마음이란 잔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데네브."
 
"... 윽,"
 
상처가 깊다. 데네브는 잠시 숨을 내뱉었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여기서 끝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이디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분명 총을 꺼내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지혈을 돕고, 상처 위로 포션을 부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포션을 쓸 수밖에 없어요. 조금만 참아봐요. 머릿속을 헤집는 지독한 통증이 잠잠해진다. 통증 다음에 온 생각은 의문이었다. 데네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잔인하고, 자비를 모르는 사람이 왜 지금에 와서는 자비를 베풀고 있는가? 이디스는 데네브의 침묵 어린 질문을 받아 들고는 가만히 웃었다. 그는 그 미소를 알고 있었다. 평소의 그 불쾌한 미소도, 텅 빈 것도 아닌... 아주 평범한 사람 같은 미소. 그냥, 동생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도와줬어요. 이제 일어나요. 곧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더 올 테니까... 이디스는 데네브를 부축한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못 걸을 정도도 아니었다. 곧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데네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디스는 빈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빈 포션병을 밟아 부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로는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여겼는데.
 
"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이디스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보다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오랜만이네요? 데네브는 그 미소에 표정을 한 번 구기고 신과 이디스 사이를 가로막듯 선다. 오랜만입니다, 선배. 선배? 그 호칭에 신은 멀지 않은 일을 떠올린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남부 사람들과는 사이가 보통 나쁜 편이라고 했으니까. 신의 생각을 눈치 좋게 알아챈 이디스는 두어 걸음 물러나서는 양손을 가볍게 들어 보인다. 싸울 생각으로 온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만날 줄도 몰랐고요. 데네브는 짧은 침묵을 지키다가 그와는 싸울 일이 없다고 했다. 최악인 관계는 아니니까. 그렇다고 마냥 경계를 풀 수도 없지만. 데네브는 신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신은 잠시 이디스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오랜만에 대화하는 타 지역 사람이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데네브의 표정을 보곤 그저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우연이예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급하게 아가씨를 들여보내요?"
 
"혹시나 하는 사고를 방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선배가 가장 처음 알려준 것 아닙니까?"
 
어머. 이디스는 밝게 웃다가 곧 말을 건넨다. 시간 있어요? 오늘 밤이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면 내일도 괜찮고. 하지만 되도록이면 빠른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데네브는 이디스의 말투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찾을 수 있었다. 조급함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디스는 시간을 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타인을 존중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아니면 압살 하거나... 한숨을 한 번 쉰다.
 
"오늘 밤에 뵙죠. 어디서 보면 될까요."
 
"내가 찾아갈게요. 마침 가지고 있는 스크롤이 있어서."
 
스크롤을 쉽게 구하는 정부 소속의 사람은 선배밖에 없을 겁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설마요. 이디스는 곧 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데네브는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해줄 것도, 전해받을 것도 없다. 애초에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군.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헝클어트리곤 걸음을 옮겼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함이 커진다. 이디스가 위험한 행동을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 불안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어딘가를 내다보았던 건지... 답지 않게 긴장을 하고 있네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본다. 이디스는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자. 이디스는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봐요."
 
데네브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유골함이 있었고, 위에는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두 글자. 순식간에 머리 위에 물을 맞은 것만 같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때는 너무 급했다. 과정과 결과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잔해가 애달팠다. 그저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남은 것을 수습할 정신도 없이. 데네브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자를 향했다. 내가 대신 수습했어요. 당신이 워낙 정신이 없어 보였어서. 계속 가지고 있었냐는 말에 그저 웃어버리고 만다. 내 동생의 유골함 옆에 뒀었어요. 가끔 향도 피우고, 이야기도 읊어보고... 닿지 못할 사죄도 해보고요. 데네브는 고개를 푹 떨구고는 유골함을 끌어안았다. 제 동생이 얼마나 작았는지를 떠올린다. 살아있을 적에도 그렇게 작았는데, 지금은 더욱 작아져버리고 말았다.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해. 데네브는 우는 줄도 모른 채로 울었다. 숨을 토해내면서 서럽게도 울었더라. 이디스는 눈물을 지켜보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인다. 먼 옛날 동생에게 했던 것처럼. 조용히, 느릿하게 쏟아지는 슬픔을 끌어안는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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