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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기계 영혼.

by @Zena__aneZ 2025. 3. 4.

적막. 찢어질 듯한 그것은 이 무저갱 위의 온갖 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휴머노이드 봇은 무저갱 위를 하염없이 거닐었다. 그저 입력된 대로 걷는 것일 뿐이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위협으로 가득 차있는- 곳을 거니는 걸음은 지나치게 사람을 닮아 있었다. 휴머노이드 봇이 사람을 닮았다니, 꼭 농담 같은 말이었지. 기계 안구가 깜빡거린다. 마물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센서가 울리고, 샌드웜이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휴머노이드 봇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몇 번의 총성이 울리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것은 장기도 없는 주제에 숨을 내쉬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었다.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 센서 등이 붉게 점멸한다. 인간의 신체를 모방한 기계에서 온갖 빛깔의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전투봇이 망가지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소모품처럼 쓰는 물품에 가까웠으니까. 망가지고 부서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경악스러울 것도 없었다. 또다시 적막이 엄습한다.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쓰러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람이 아니니까. 소모품이니까. 다시 센서가 깜빡거린다. 이제는 완전히 떨어져 나간 팔에서 스파크가 튄다. 냉각수가 피처럼 흐른다. 휴머노이드 봇은 그것을 내려다본다. 영혼이랄 것도 없던 것의 기계 안구에 공포와 닮은 것이 새겨진다. 그것은 감정을 느낀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오작동 중에 하나일까? 그저 오류에 불과한 걸까? 감정을 제거하면 이 두려움까지 사라지고, 영영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는 걸까? 알 수 있는 게 없다.
어느덧 망가진 다리의 센서도 붉게 점멸한다. 그것은 꼭 도망치듯, 어딘가를 향한다. 뛰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몸짓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미 망가진 기계였으니까. 이대로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소모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감정을, 그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기계도 느낄 수 있다니. 오류로 인해 기계가 감정적이게 된다니. 이런 우스꽝스럽고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망가진 다리를 질질 끌고 도착한 곳은 완전한 폐허였다. 도망친 곳에 낙원 따위는 없다. 애초에 낙원을 바라고 도망친 것도 아니었지만. 웃음소리 같은 기계음이 흐른다. 몸이 기울었다. 시야라고 해도 좋을 것이 뒤집힌다. 이대로 전원이 꺼지면 영영 켜지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폐허였으니까. 애초에 망가진 전투봇을 시간 들여 볼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천천히, 서서히... 죽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소모되고 싶지 않았다. 열망을 닮은 것은 천천히 몸집을 불려 나간다. 누구라도 좋으니 구해 주었으면 했다. 센서가 요란하게 울린다. 구조신호를 모방한 소리가 삑삑거린다. 곧 누군가 다가온다. 사람이다. 검푸른 빛깔을 가진 자를 올려다보던 전투봇은 남은 손 한쪽을 움직여, 다가온 이를 향해 뻗었다. 애처로운 것만 같은 손길과, 기계 음성이 긁어대듯 흘러나온다.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 소모되고 싶지 않아. 살려줘. 곧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걱정 마세요. 금방 치료해 줄게요.
기술자는 희끄무레한 영혼을 가만히 응시한다. 희미한 연기가 흘러나온다. 그것이 거의 다 망가졌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망가짐만을 뜻하는가? 아니, 아니었다. 그 기계는 분명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 녹아내린 인조 피부가 서럽게도 일그러져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응시하던 자는 가만히 손을 뻗어 기계를 수리한다. 당장이라도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는 전투봇을 수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으나 위험하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술자였고, 그 이전에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전투봇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눈으로 기술자를 바라본다. 반쯤 뜬 기술자의 눈이 선명한 네온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기계 안구에서도 다정함을 엿볼 수 있다니. 눈을 가진 모든 것은 결국 영혼이 있다는 반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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