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첫 번째 안녕.

by @Zena__aneZ 2025. 3. 1.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한없이 잔인해 보이지만 덧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워서, 이윽고 모든 것을 품어준다. 오색찬란한 꽃들과 나무들, 강과 바다, 하물며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수많은 생명과 그들이 이룬 문명까지도 품어주고 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품는 자연은 모두의 어버이였고, 모두를 사랑하며 아꼈다. 작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은 채로. 행성 아르카디아는 이 자연 속에서 사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사소해 보일지도 모를 야트막한 것조차 귀이 여기는 것은 어버이의 덕목이 아니던가? 이 땅 위에서 태어난 모든 것들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자연 속의 식물들. 모든 것들의 화원 속에서는 가끔,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굉장히 드물게 생기는 신비와 같은 것. 거대한 자연 속에선 이따금 식물에서 비롯된 생명이 태어난다. 다른 생명은 온전한 신비에서 비롯된 존재를 화인花人이라고 불렀다.
거대한 꽃이 꿈틀거린다. 꽃잎 사이로 녹색과 살구색이 섞인 줄기가 뻗어져 나온다. 곧 꽃잎이 죽 찢어진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작은 새가 세상과 신을 향해 날갯짓하듯, 온통 부드러운 식물의 줄기와 꽃잎, 자연의 싱그러움으로 이루어진 것은 미끌거리는 꽃잎과 짙은 흙냄새를 맡고는, 숨을 크게 내쉰다. 잔뜩 쪼그라들었던 몸의 내부가 팽창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잠시 감았다 뜬 눈이 이 행성과 닮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투명해 빠져들 것만 같은 새파란 눈. 눈의 가운데에서 흰 초승달 모양이 반짝거린다. 고개를 위로 향하다가, 다리를 닮은 줄기 더미를 바닥에 내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바람이 느껴진다. 식물 줄기가 옅은 바람에 살랑거린다. 방금 막 걷기 시작한 존재는 세상의 모든 흐름 가운데에 놓여있다. 부드럽고 포근한 햇살이 닿는다. 다정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꽃잎 안에서 수많은 식물들의 속삭임을 들었으니까. 이 연약한 존재는 서서히, 아주 천천히 걷다가- 누군가를 마주한다. 대지, 행성 그 자체인 자. 아르카디아. 작은 화인은 아르카디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치 각인된 것처럼 그에게 다가간다. 투명하고 깨끗한 눈이 마치 물을 담아놓은 듯 찰랑거린다.

안녕, 아가.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린다. 식물들의 언어. 작은 화인은 그 목소리를 흉내 내듯 말을 잇는다. 몇 번 입맛 벙긋거리다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녕, 안녕...?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자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린다. 곧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아 올리곤, 여린 분홍빛의 머리칼을 조심히 넘겨준다. 안녕, 아가. 너를 만나서 행복하단다. 꽃잎 안에서 서서히 형태를 잡아갈 때 들었던 것이었다. 작은 화인은 곧 안녕, 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처음으로 배운 단어. 이후 단어들이 늘어진다. 피아노 건반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소리와 현악기의 줄 위를 오가는 것만 같은 향기로운 소리가 길게, 아주 길게 늘어진다. 둘은 꼭 닮은 눈을 하고 다정함을 나눈다. 바람이 부드럽게 흩어진다. 꽃향기가 가득하다. 살구색과 녹색이 섞인 줄기가 부드럽게 하느작거린다. 이 땅 위에서 생명을 가득 머금은 생명이 다정하고 부드러이 흐드러지며 향기로이...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의 계약.  (0) 2025.03.04
메밀꽃 포말  (0) 2025.03.03
빗속에서...  (0) 2025.02.26
낯섦에 기대는.  (0) 2025.02.25
애정도, 죽은 것도 무겁다.  (0) 202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