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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밤의 계약.

by @Zena__aneZ 2025. 3. 4.

소름 끼치게 고요한 밤은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피웅덩이 사이를 힘없이 걷던 이는 붉게 물들어 끈적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다. 피냄새. 먹은 것도 없어 헛구역질만 몇 번 하다가, 시체처럼 비적비적 걷는다. 다른 사람이 그 꼴을 봤다면 그조차 마물인 줄만 알았을 것이다. 아켈라는 마물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물을 끌어들이는 미끼일 뿐이었지. 마물은 어떻게든 돈이 되었고, 그런 마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성년인 아이들을 미끼로 쓰는 건 이 무법지대에선 그리 경악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피로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던 이는 문득, 눈앞에 호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피로 젖은 손을 가만히 호수에 담가 보았다. 독은 없었다. 물이 충분히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망설임 하나 없이 호수에 뛰어든다. 생각보다 깊어서 다행이었다. 피를 충분히 씻어낼 수 있었으니까. 물 위로 올라왔을 때, 문득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빛 한점 섞이지 않아 탁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이 하늘을 향한다. 타고 남은 잿더미 같은 머리카락이 무겁게 늘어진다. 언젠가는 저 하늘을 좋아했던 적도 있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무언가를 좋아하고 아낄 수 있던 때가 까마득하게 멀다고 느껴졌다.

 

"..."

 

그냥 도망칠까. 어차피 죽은지도 모를 텐데. 관심도 없었을 테니까. 그저 잘 살아남는 미끼여서 아쉽다고만 생각할 텐데. 아켈라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가만히 손을 들었다. 물 위에 손가락으로 가만히 마법진을 새겨 나갔다. 적막함이 가득한 눈에는 언뜻 피로감이 감돌았다. 고작 열넷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는 잔인함과 매정함을 알았다. 실력이 없다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이 모든 고요가 당연했다. 신을 찾은 적도 없었다. 간절한 적도 없었다. 이 세상은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었으니까. 희망은 다 갖다 버렸다. 그리하여 지옥이 되었고, 하지만 지옥인 줄도 모르고... 아켈라는 마지막 마법진의 획을 그었다. 어두운 푸름이 장막처럼 퍼져 나온다. 아켈라는 그 파란 장막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소환된 정령을 보았다.

 

"안녕, 나의 작은 계약자!"

 

처음 든 감상은, 단지 그것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정령이다. 도자기를 잘 빚어 만든 것만 같은, 그러니까, 꼭 공예품처럼.  밑바닥에 잠겨있다가 건져진 인형 같은 자신과는 다르게 밝고 부드러우면서... 아켈라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침음을 흘린다. 그러고 보니, 계약할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소환술만 익힌 것일 뿐이었으니까. 계약할 때, 대가가 필요해? 밤의 정령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기울인다. 대가? 아켈라가 조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정령들은 대가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과 계약을 맺어 자유롭게 오가며 이 세상을 느끼고, 함께 거닐고, 가끔 음식을 같이 먹기도 하는 것은 정령에게 있어서도 좋은 기회였으니까. 이 작은 계약자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아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아켈라의 말이 더 빨랐다. 피와 살은 내어줄 수 있어. 하지만 생명력 자체는 곤란해. 그게 필요하다면... 세상에. 이 작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밤의 정령, 녹스가 이 소환술에 응한 것은 그리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계약하는 것 자체가 좋은 기회였고 아켈라가 상당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도, 이 작은 사람의 눈이 너무나도 적막하고 고독해 보여서. 가장 먼저 온 것이었다. 아무리 정령이라도 인간계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린 사람이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깐만! 나는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아!"

 

"... 그러면?"

 

"나는 계약자인 너만 있으면 충분해. 계약을 맺는 것 자체가 정령들에게 꽤 좋은 일이거든."

 

아켈라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대가가 없어 다행이었다. 생명력이나 피나 살 따위를 내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니, 이 얼마나 우습고... 애처로운 말인지. 아켈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는다. 그렇다면, 나와 계약하자. 좋은 계약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밤의 정령은 어린 계약자의 손을 잡는다. 손등에 표식 하나가 생겨나 반짝이다 사라진다. 너는 충분히 좋은 계약자가 될 수 있을 거야. 내 작은 사람. 그 말을 끝으로, 밤의 장막에 감싸인 채로 자취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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