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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신록의 애정.

by @Zena__aneZ 2025. 3. 7.

꽃의 용족은 하염없는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생명들을 응시한다. 연약하고 작은 생명, 덧없고 부드러운 생명들을 바라보는 자의 신록을 담아놓은 것만 같은 눈이 선명히 빛난다. 애정이 가득 담긴 눈이 찬란했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덧없게도 빛난다. 나의 작은 사랑들아. 태양조차 빛바랠 정도의 선명하고 맑은 미소를 지으며 생명들을 끌어안는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꽃의 용족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들은 스스로 걷기 시작한다. 이윽고 날개를 펼쳐 저 멀리 날아간다. 수명 자체가 다른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일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꽃의 용족은 작은 생명들을 애틋하게 여겼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증오에 가까웠을지도 몰랐다. 인간에 의해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린 자는 검은 뿔에서 언제나 잿빛의 꽃을 피워냈었다. 그리하여 꽃의 지옥이었다. 생명을 말라가게 하는 검고 흰 꽃들이 땅을 가득 채운다. 모든 것을 사랑했던 자가 땅을 말라가게 한다. 죽어가는 땅 위에 서서 진혼곡을 부른다. 하염없는 슬픔에 잠겨있을 때, 이 죽음의 땅에 버려진 작은 생명을 보았다. 그냥 두기만 해도 죽을 것처럼 보이는 작은 생명을 내려다본다. 그 생명에게 손을 뻗었던 것은, 죽어가던 제 아이가 떠올랐던 탓이었나. 꽃의 용은 아이를 가만히 안아 올린다. 그토록 작았는데, 제 아이보다도 더 작은 생명에게 못내 마음이 쓰여서...

괜찮아, 울지 마. 해치지 않을게...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는 작디작은 생명을 끌어안는다. 죽음이 만연한 이 땅에서 꽃은 여전히 향기로웠고, 슬픔과 증오로 생을 쓸어내던 이는 다시 사랑을 새긴다. 오로지 사랑하며 살아온 자에게 생을 찢어발기는 증오와 분노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것은 영혼을 엉망으로 녹슬게 하고 부서지게 한다. 눈물이 꽃잎처럼 흩어진다. 분노로 살아갈 수 없던 용은 작은 아이를 키운다. 이따금 문득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사랑으로 덮는다. 이윽고 작은 아이가 멋진 어른이 되었을 때 손을 놓아준다. 사랑을 한 아름 받으며 자란 생명은 홀로 걷기 시작한다. 시간이 서서히 지나가고, 생명이 다시 돌아온다. 인간의 시간은 덧없이 짧은 것이라서, 다시 만났을 때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다시 찾아오기 무서웠어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어?"

"제가 다른 인간들과 섞여서 살기 시작했을 때, 당신의 슬픔이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다 늙은 인간은 주름진 손을 두어 번 쓸다가, 꽃의 용을 보고 웃었다. 제게도 아이가 생겼을 때가 가장 두려웠어요. 자식을 잃는 그 마음을 차마 헤아릴 수가 없어서요. 하지만 그 아이가 커서 결혼할 사람을 데려왔을 때, 작은 손주를 안았을 때... 이해했어요. 당신은 공허로 살아남은 게 아니라는 걸. 사실은 내가 만든 두려움에 갇혀서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것일 뿐인데. 많이 후회가 됐어요.

"다시 한번 안아줄 수 있어요? 엄마..."

"당연하지. 내 사랑스러운 아가야."

꽃향기가 화사하다. 작은 생명이 이토록 강인해졌다니. 온갖 색채의 꽃이 가득 피어난다. 생명의 끝자락에 걸쳐 있던 사람은 꽃다발을 조심스레 끌어안듯이 꼭 안긴다. 따뜻하던 몸이 미지근해진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구나. 여기서 푹 쉬렴, 아가야. 이곳은 언제나 너의 집이 될 테니까...
그는 수많은 생명들을 키운다. 작은 인간, 엘프, 정령... 화인이나 인어, 홀로 남은 어린 용까지.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으면서, 새로이 만난 자들과 떠나간 자들의 이름을 새긴다. 화사한 색의 꽃이 가득한 곳에는 그가 키운 이들의 흔적이 있다. 기나긴 시간에 빛바래 쓸려 나간대도 그의 영혼 속에 모두 새겨져 있었다. 전부 지워진대도 괜찮았다. 생명이 떠나고 남은 자리마저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꽃의 화신이라 불리던 용족, 플로라는 여전히 작은 생명들을 귀이 여기며 사랑한다. 신록이 담긴 눈은 여전히 애정을 머금고 찬란하게 빛난다. 라벤더빛 머리칼이 바람에 부드럽게 물결친다. 사랑들아, 나는 네 야트막한 숨소리도, 흔적도 없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너를 사랑할 수 있어. 그리 말하고 환하게 웃었다. 빛을 받아 흐드러지는 꽃의 색채가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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