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을 바닥에 꽂은 채로 서있다가 곧 빼들어선 검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다. 불씨와 바람의 향기가 사라진다. 곧 기지개를 쭉 켜곤 주변을 둘러본다. 적이라고 인식되는 개체는 더 없었다. 뺨에서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코끝에 맴도는 피의 향기에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피를 닦는다. 제법 치열한 전투였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지하의 도시는 서늘하기만 했다. 포션병을 열어 포션을 들이켠다. 누군가의 눈물과 잿가루의 맛이 입안을 맴돌다가 미끌거리며 넘어간다. 옆구리에 제법 깊게 박힌 화살을 빼낸다. 패인 상처에서 살이 차오르며, 곧 작은 흉터 하나만을 남긴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한 것을 생각한다. 분명 피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했는데, 전날 온종일 전투로만 보낸 것이 화근이었는지... 뻐근한 어깨를 툭툭 두드리다가 곧 침낭을 펴 눕는다. 시계가 새벽이라는 것을 알렸기 때문에. 새카만 천장에 녹색의 옅은 빛이 별처럼 깜빡거린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흩어진다. 연푸른 빛깔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꿈속을 유영한다. 부드러운 감각 한가운데 몸을 뉘인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아스라지는 풍경 속을 하염없이 떠다닌다. 곧 밀밭이 펼쳐진다. 현실에서 보았던 풍경. 무의식 중에 이 풍경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가?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꿈속에서 한참을 떠다니다가 점차 꿈이 얕아진다. 햇빛 없는 지하였지만 습관이라는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하에 꽤 오래 머물렀으니 이제 슬슬...
펼친 손 위에서 빛무리가 감돌다가 문득, 빛이 사라진다. 이질적인 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처음에는 걷는 것만 같은 소리가 뜀박질이 되었고, 그는 망설임 없이 대검을 꺼내 곧바로 날아오는 파동을 가르듯 횡으로 긋는다. 선명한 방패 모양이 반짝, 생겼다가 사라진다. 피부가 저릿 거리는 감각이 느껴진다. 바로 막지 못했다면 치명상이었겠지.
한때 지하도시의 수호자였던 것은 이제는 끔찍한 병기가 되었다. 사람을 지키려고 만들어진 것은 더 이상 그 무엇도 지키지 않는다. 환상 속에 갇혀 영원을 떠도는 것... 곧 대검을 고쳐 잡는다. 고양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푸른빛이 감도는 대검에 붉은 이채가 서린다. 지하도시를 지키던 것은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이후로는 검을 휘두르는 소리와, 둔탁한 소리만이 들린다. 포효에 가까운 소리, 퍼져가는 어둠, 검푸른 빛깔 속에서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보랏빛 머리카락.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이. 선율을 만들듯이. 약간의 틈이 생긴 사이에 파동을 정통으로 맞는다. 몸이 붕 뜨듯이 움직였지만, 곧 대검을 던졌다. 완벽한 궤적으로 날아간 대검이 곧 그것의 핵에 꽂힌다. 그것의 몸은 무너졌다. 아... 드디어. 입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대충 닦아내고 그것의 심장에 꽂힌 검을 빼든다. 몸이 무너질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괜찮았다. 남은 포션을 하나 더 마시고는 빈 병을 가방 안에 쑤셔 넣는다. 손 위에 빛무리가 떠다닌다. 상처투성이의 손이 옅게 떨린다. 빛무리를 움켜쥐자, 눈부신 빛이 눈 안으로 침투한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동공이 강렬한 빛에 작아진다. 표정을 한 번 찌푸렸다 펴곤 걸음을 옮긴다. 가지고 온 재료들을 상자에 모두 넣고는 강가로 걸음을 옮겼다. 경갑과 가방을 빼두고 물속에 들어간다. 물이 깊었고, 무척이나 깨끗했다. 마치 몸을 씻어내듯이 피와 얼룩을 씻어내곤 물에서 나온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강가에 대충 침낭을 펴 눕는다. 지하도시와 달리 포근한 햇살이 가득하다. 전투로 긴 시간을 보낸 이에게는 이 야트막한 평화가 소중했다. 고대도시에 있었던 이들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수호자를 만들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짧게 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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