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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슬픔에 무너지지 말아

by @Zena__aneZ 2025. 3. 14.

클레나는 정 많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 다정함에 메말라가면서도 언제나 손을 먼저 뻗을 줄 알았다. 홀로 남겨진 아이를 유일한 가족으로 삼은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도저히 혼자 둘 수 없어서. 지나쳐 가기에는 너무 다정했던 사람이라서. 혹은, 홀로 남은 모습이 마치 자신과 같았기 때문에. 이름도 없이 혼자인 아이에게 죽은 동생의 이름을 준 것은, 그 작은 것이 자꾸만 애틋해진 탓이었다. 클루디, 내 동생. 그 말을 중얼거리며, 겨우 세 살이 넘었을 아이를 품에 끌어안는다. 너를 지켜줄게. 버려진 너를 내 멋대로 나의 가족으로 삼았으니까... 반드시 지켜줄게.
클레나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볕으로 이끌었다.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지만 가끔은 해가 떴다. 햇살이 땅을 비춘다. 메말라가던 사람은 클루디가 제 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나는 자신이 이 아이를 구해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 작은 아이가 클레나를 구한 것이다. 소중한 것 잃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다시 소중한 것이 생기다니, 그렇게 다시 볕을 쬐는 삶이라니. 농담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선율 같은 말이기도 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곧 익숙한 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 린이구나. 어서 와. 다친 곳은 없지? 그 말의 끝에 짧지만 온정 어린 말들이 오간다. 클루디를 구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생긴 인연이었다. 많이 지쳐 보이고, 어딘가가 날카로웠던... 하지만 온기를 그리워했던 사람. 클레나는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아보았다. 자신 역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언젠가 큰일이 생기고, 그걸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도망쳐도 괜찮아. 죄책감 갖지 말고 도망쳐. 책임질 필요 없으니까. 원망하지 않을 거냐는 말에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며 웃어버린다. 살기만 해. 모든 생각은 그 이후에 해도 돼. 그래도 괜찮아. 살아남기만 하면 된 거야. 아직 어린 이의 머리칼을 익숙한 손길로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도닥이곤 조심히 손을 거둔다. 잠에 들어있던 클루디가 얕은 웃음소리에 깨서 조심조심 나온다. 클레나와 셀린, 클루디는 혈연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더 깊었다. 그래서 클레나는 둘의 보호자가 되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을 지키고 싶어서. 작은 안온이라도 쥐여주려고. 야트막한 온기에 기대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잘하는 거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아..."

기절할 것만 같은 감각에 뒤집혔던 시야를 애써 부여잡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을 시간도 없었다. 셀린이 평소와 같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이후로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득 오염이 시작됐다. 땅의 서로 다른 두 에너지가 폭발하듯 끓어오르며 합쳐지고 마물을 쏟아내었다. 폭음과 비명이 들끓었다. 클루디를 그나마 안전한 곳에 놓았지만 이곳은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클레나는 용병 일을 하면서 사용했던 무기 대신 신호탄을 높이 들었다. 밝은 불꽃과 찢어질 듯한 소음이 함께한다. 모든 것의 이목이 한 곳에 쏠린다. 클레나는 무기를 잡는다. 익숙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마물을 베어 나간다. 수가 너무 많았다. 오염된 것이 또다시 터져 나오고, 마물이 순식간에 클레나의 몸을 물어뜯는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죽어가는 감각 속에서 본능 하나만으로 무기를 휘두른다. 그리고, 찢어질 듯한 고요가 찾아온다. 분명 어둡고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쏟아질 것만 같은 풍경 아래에서 아스라질 듯한 빛무리만이 일렁거렸다. 몸이 휘청거리다 그대로 넘어진다.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감각이 들었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온했다. 언니,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사랑하는 내 동생. 피투성이 손을 뻗어 아이를 끌어안는다. 온기가 온통 흐리다. 우주빛 균열로 뒤덮여있는 작은 몸이 애틋하다. 천체 마법은 많이 쓰면 안 돼. 아파. 클루디는 하염없이 울며 클레나를 붙들었다. 슬프면 울어도 돼. 하지만 눈물에 무너지지 말고,씻어 내리지도 말고... 끝에 남은 것은 귀가 멀 듯한 적막이다. 어둡고 깊은 푸른 눈이 감기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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