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아름다운 곳에는 소름 끼치는 침묵이 만연했다. 선명한 붉은 물이 바다처럼 차올라 물결친다. 자연의 한가운데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사람이 죽고, 동물들이 죽어간다.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지만 머지않아 자연의 밑거름이 된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존재만이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머무른다. 비명조차 없는 죽음과 자연의 땅은 울적한 적요만이 존재했다. 이 대지는 그 어떤 것도 긍정하지 않았다. 소리마저 죽어버린 이 땅에선 비명과 자연의 장엄함이 무성하게 피어오른다. 고요는 압살에서 비롯되는 것. 모든 생명이 침묵을 지키자, 비로소 평온함이 밀려온다. 거세게. 모든 것을 부술 것처럼...
그리고, 자연에서 비롯된 것. 무서우리만치 강인한 자연 속에서 피어난 존재는 이 대지를 닮은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태어난 것은 이 대지가 생명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울적한 빗소리와 붉은 눈물을 흡수하며 땅을 기는 것. 밑거름이 되는 것을 징그럽게 흡수한 자연은 또 다른 빛깔을 마음껏 흩날린다. 마치 스스로 내뿜는 화사한 향기가 역겨운 것처럼. 아이러니를 방어기제로 세운 것만 같은 모습이다.
침묵하며 살아라. 알아들었겠지.
이름만을 겨우 얻은 화인은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입을 굳게 닫고 있기를 선택한다. 그 무엇도 긍정하지 않는 자의 화원에서 태어난 작은 생명은 말하는 법조차 익히지 않았다. 태어나 모든 것을 부정당한 것이 애달팠던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부정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스피시오사는 가만히 붉은 바다를 바라보다가 몸을 웅크린 채로 자연 속에 숨어들었다. 작고 얕은 숨소리마저 숨긴다. 한참을 웅크리며 사는 작고 여린 꽃은,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배우려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서리 내린 차가운 마음과 애정의 부서짐을 알게 됐다. 긍정하지 못하는 자의 마음을 공감할 수는 없었으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주는 것을 기꺼워할 수 있는가? 그것이 설령 본인의 생명에서 비롯된 존재라고 할지라도. 아니, 그랬기에 오히려 더 용서할 수 없는...
더럽고 역하군. 은혜도 모르고, 감히...
바닥에 피가 흐른다. 이 대지의 주인의 것도, 스피시오사의 것도, 혹은 다른 화인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것. 아름다운 것을 훼손하던 인간이 바닥을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매캐한 혈향 머금은 바람에 물빛 머리카락이 물결친다. 바닥에 꽂힌 시선이 느릿하게 들리면, 한겨울의 눈보라보다도 찬 붉은 눈과 시선이 얽혔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으니까. 아르카디아는 그런 스피시오사를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 작은 것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다행인 일이었다.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면 바닥을 나뒹굴다가 자연에 잡아먹혀 사라지는 미물이 되었을 터였다. 분명 다행인 일이었지만... 참을 수 없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채울 길 없는 공허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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