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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다정에 익숙해져 속아버린

by @Zena__aneZ 2025. 3. 18.

셀린은 다정함을 몰랐다. 다정함이라고는 없는 삶의 한복판에 놓인 탓이었다. 메마르고 건조한 삶에 한 줌의 안온도 없이, 그저 살아남는 법을 익히는 것이 전부였다. 쉬는 법 따위 익히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의 이름도 몰랐다. 주어진 대로 압살하고 살아남는다. 이 온기 없는 땅에서 살아남기만 하는 것이 괴로웠던가? 애초에 괴로움이라는 단어를 익히지도 않고 그것으로 점철된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까? 이름을 몰라도 알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괴롭고... 하잘것없는지. 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명이 길게 이어지다가, 곧 뒤집어진 시야가 바로잡힌다. 상처 투성이의 손이 뻣뻣하다. 곧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눈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책이나 영상에서만 보던 은하수가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곧 아스라질 듯한 별빛이 우아한 흔적을 남기며 사라진다. 처음 보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다가, 곧 근처에 있던 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황홀경을 그리던 이는 아직 여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몸 위에 자잘한 우주빛 흔적-균열-이 남았다가 사라진다. 서부에서 흔하지 않은 마법. 아니, 마법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끌어들이고 만들어내... 어떠한 현상과도 같은 것.

 

"...!"

 

작은 아이는 셀린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을 눈치챘는지 화들짝 놀란다. 안절부절못하다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일을 방해했, 했어요...? 위험, 위험해 보이길래... 작은 아이는 자신이 어떤 힘을 쓰는지도 모른 채로 더듬더듬 말을 건넨다. 셀린이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른 이가 다가온다. 클루디! 괜찮아? 그 힘은 많이 쓰면 안 되는...

 

"아, 세상에...! 괜찮니? 많이 다쳤는데... 클루디가 도와줬구나."

 

"... 저, 괜찮은—"

 

"괜찮다고 하지 말고, 치료라도 받아. 내 동생이 워낙 자잘하게 많이 다쳐서 치료는 잘하거든."

 

다정한 미소. 살아남는 것만이 아닌 타인을 살게 하는 것. 다정함 없는, 메마르고 건조한 삶의 위에는 느릿한 다정함이 내린다. 마치 아주 오래도록 다정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혹은 처음 마주하는 것에 홀린 것처럼... 뻗어오는 손을 조심히 잡는다. 클레나는 뻣뻣하게 굳은 상처 위에 약을 뿌리고 정성껏 밴드를 붙인다. 처치를 끝낸 후에는 대화를 나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들. 셀린은 곧 깨닫는다. 이 생은 메마름만으로 버티기에 가혹해서, 또다시 이 다정이 그리워질 거라고. 그것을 눈치 좋게 알아챈 이는 밝게 웃었다. 종종 찾아와. 나랑 내 동생은 늘 여기에 있으니까. 언제나 이곳에서 지내냐는 질문에 웃음 섞인 목소리로 화답한다. 고향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서. 최대한 오래 머물 생각이야. 운명이 허락하는 데까지.

그날 이후로 셀린은 둘이 있는 곳에 종종 찾아갔다. 어쩔 때는 클레나가 반겨주기도 했고, 클루디 혼자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것은 작은 안온이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연약한 것. 하지만 이 야트막한 것에 기대서 버티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으로 얻은 평온함이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린, 피곤해 보여..."

 

"괜찮아. 그렇게 피곤하지 않아."

 

클루디가 셀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품에 안겨온다. 온기가 포근하다. 이 작은 은인은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앞으로도 몰랐으면 했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상처투성이라서.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인 탓에. 홀로 남는다면 결국 강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균열 모양의 흉터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아이의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강한 힘을 쓰지 않고도 무사하길 바랐다. 하지만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은 잔인하고, 사고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으니까. 큰 사고가 생긴 것을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찢어질 듯한 적막함만이 가득했다. 우주색 균열로 온몸이 뒤덮인 채로, 클레나의 차가워진 몸을 끌어안고서 셀린을 바라본다. 미안해, 못 지켰어. 지켰어야 했는데. 못 지켜서... 언니가 죽었어. 내 잘못이야. 클레나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한 채로 붙들려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건 그냥 사고일 뿐이야. 죄책감 갖지 마. 늦게 와서 미안해. 혼자서 무서웠지... 셀린이 팔을 끌어 아직 어린 이의 몸을 끌어안는다. 몸 위에 그려진 균열이 여전히 컸고, 지나치게 아파 보였다. 하지만 아픔마저 슬픔에 마취된 듯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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