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붉은 백합은 희게 물들고.

by @Zena__aneZ 2024. 6. 22.

릴리는 보호술사였다. 그 시대에서 보호술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력으로 만들어진 천재인지, 천재였기에 노력을 한 것인지.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릴리는 천재였고, 그 힘을 악용하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북부는 뭐가 문제인지..."

내 고향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니까. 릴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곤 혼잣말을 이어갔다. 북부는 이상했다. 최소한 천재라고 불린 릴리의 상식 안에서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릴리는 직접 목도하지 않은 진실에 대해서 그려낼 수 있었다. 북부에서는 인신공양이 이어진다. 또한 신을 향한 광적인 믿음이 있었다. 신이라고 불리는 이는 그것을 필시 원하지 않았으리라.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지 없이 구원을 바랐고, 구원할 수 있는 자 또한 아무런 의심 없이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노력과 의지도 없이, 고통과 환희도 없이, 누군가는 바라지도 않았던 낙원의 존재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 모든 이들에게 낙원을 가져다주지 마. 누군가는 낙원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너는 늘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하지만, 알겠어. 기억해두고 있을게."

그것만으로 충분해! 릴리는 더없이 밝게 웃어 보였다. 릴리의 말을 들은 이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짓다 따라 웃었다.
미묘한 푸름 섞인 녹빛 눈 안에 흰 설원이 보였다. 라데. 그 목소리에 누군가 뒤를 돌아봤다. 하얀 설원과 은색 머리칼이 지독하게도 잘 어울렸다. 무지함은 죄라고 하잖아. 넌 네가 무지하다고 생각해? 질문이 설원의 바람에 흩어진다. 흩어진 질문을 들은 이는 미묘한 침묵을 지킨다. 질문을 듣지 못한 것인지, 대답하기 싫었던 건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인지... 어쩌면 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은 확실하게 흩어져 없어진다. 그것은 신실한 신자를 위한 신이라 불린 자의 안배였나?

"시기를 계산하면 이제 곧이야. 고대 마수가 깨어날 거고, 그렇게 된다면 물러날 수 없겠지."

지금 전투에 도움이 될만한 용병은 극소수야. 그리고 전멸을 피하는 것도 고작이겠지. 그러니까, 잘 들어. 이후에 있을 상황에서... 릴리는 어떠한 말을 전하곤 그저 웃었다. 라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뒤로 물러나!!"

릴리가 방어진을 펼쳤다. 전력 손실이 크게 났고, 고대 마수도 더는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범주 내였다. 그래서 릴리는 자신의 생명력마저 모두 쏟아붓기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남은 이들이 고대 마수를 안전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북부를 지킬 수 있다. 남은 사람들도 지킬 수 있다. 죽은 용병들을 추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떠나고자 한 사람도, 남고자 한 사람도 모두 무사할 것이 틀림없었다.
고대 마수가 방어진을 산산조각 냈으나 그 반동으로 고대 마수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릴리의 몸이 허물어진다. 심장이 쥐어뜯기는 통증과 함께 뼈가 어긋난다. 하지만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릴리를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던 용병들은 고대 마수를 처리하려 빠르게 나아간다. 릴리는 그중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

이름이 불린 이가 릴리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정도의 부상이면 살 수 없다. 지금 당장 산다고 해도,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희망보다 절망이 더 가까운 세상이었다. 릴리는 그의 표정을 빤히 들여다보다 웃어버리곤 손을 뻗는다. 육신 위에 강렬한 푸른빛이 새겨진다. 그동안 수많은 마수들과 싸워오며 숱하게 받은 보호술이다. 내 이별선물이야.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그런 장난 섞인 말들을 내뱉는다.

"난 북부가 좋으면서 싫었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상처 입히고 말아."

이제 저 멀리 떠나.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길이 험할 테니까 조심하고. 릴리는 더없이 밝게 웃었다. 모든 감각이 울렁대는 탓에 목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하고 표정도 보지 못한 것이,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저만치 멀어지는 발걸음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것이 몇 없는 아쉬움이었다. 입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울컥 쏟아졌다. 몸이 눈밭에 기운다. 온통 따뜻한 감각에 휩싸인다. 일평생 춥게 살아 끝조차 추울 줄 알았는데, 이 끝에서 따뜻해진다. 이 차가웠던 생이, 드디어 데워진다.
하얀 눈이 붉은 백합 위에 소복하게 쌓인다. 강렬한 붉은빛을 띠던 머리칼이 하얘진다. 뜨거운 피가 푸르게 얼어붙었다. 이윽고 붉은 백합은 희게 물들었다. 고대 마수 토벌이 끝났고, 살아남은 자는 또다시 살아간다.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술과 생명.  (0) 2024.06.23
언젠가의 가능성.  (0) 2024.06.23
최악으로 변화하는 것.  (0) 2024.06.21
영원히 녹슬지 않는 것.  (0) 2024.06.20
행복한 꿈을 꾸는 중이야.  (0) 202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