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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불길 속에서의 사죄. 그리고...

by @Zena__aneZ 2024. 7. 23.

집이 불탄다. 에리카는 기침을 내뱉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강렬한 분홍빛의 선이 뻗어나가 죽음의 공포에 잠긴 사람들을 감싸고 바깥으로 인도한다. 괜찮아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사람들은 불신하면서도 에리카의 말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에리카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 안에 가득 넘실거리던 마나가 서서히 짓눌린다. 집안 바닥에는 온통 주술진이 깔려 있었고, 집안에 있는 이단자들은 그저 피해자였다. 이것은 에리카를 위한 화형장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에리카는 속죄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속죄하지 않는다면, 그 집단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에리카는 기침을 내뱉었다.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그 끔찍한 화마는 신실한 자의 몸을 태워나갔고, 머지않아 생명의 불씨를 조금 남겨두고 사그라들었다. 오래도록 고통받으라는 신의 뜻일까. 혹은 죽은 이들의 원성일까. 무엇이 되었든 에리카는 이 고통마저 기꺼웠다. 고통스럽게 숨을 내뱉다가 제 앞의 사람을 바라본다. 칠흑빛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 붉은 눈. 에리카는 한때 그것을 두렵다고 여겼으나, 지금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디안 리오네트는 답지 않게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선명한 불꽃이 그의 마나에 짓눌려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선명한 분홍빛 색채를 가진 이를 찾았다. 디안 리오네트는 에리카를 알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죄라고, 한 번만 도와달라고, 다른 이들을 구해달라고, 그들은 죄가 없다고 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기분이 나빴다. 불쾌했다. 디안 리오네트는 사제라면 모두 싫었으나 고작 제 자식보다 조금 더 많을 것 같은 이가 하는 엉망인 사과와 부탁을 듣고 싶지 않았다. 결국 피해자와 다를 것 없는 이에게 그런 사과를 들어봤자... 그래서 이번에도 구하고자 했다. 누군가를 구하다가 자신을 구하지 못한 아이를. 하지만 구하지 못했다. 그것에 못내 마음이 쓰였다.

"아..."

에리카는 숨을 내쉴 때마다 타들어간 폐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느낀다. 몸에 걸려있는 치유마법이 효력을 끝내면 이 숨도 끊길 테다. 디안 리오네트는 그런 에리카의 앞에 몸을 낮추어 앉았다. 에리카는 그런 다정한 행동을 보고 애써 말을 이어간다. 저는 당신의 가족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의 죄를, 저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제 속죄로,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셨다면... 에리카는 자꾸만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뜬다. 치유마법이 서서히 끊긴다. 다시 한번 진심을 담는다.

"제 죽음이, 당신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제멋대로 굴러 떨어진다. 이건 속죄의 눈물이었고 고통의 눈물이었다. 얼굴에는 온통 미안하다는 듯한 웃음뿐이었다. 디안 리오네트는 다정했던 누군가에게 배운 대로 말을 꺼낸다. 거기에서는 편히 쉬어. 그 목소리가 위안이 되었던가...

"부탁, 이... 있습니다. 다음에,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름을..."

당신의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다고. 그 말 이후 마법이 온전히 끊겼다. 야트막한 숨이 끝난다. 한 생명의 종말이다. 디안 리오네트는 그 몸을 조심히 안아 들고 나온다. 눈만이 가득한 이곳의 바람은 여전히 햇살로도 데워지지 않아 혹독하게 추웠으며...

많은 시간이 흐른다. 북부의 추위가 여전할 어느 때였다. 디안 리오네트는 설원에 홀로 서있는 아이를 찾았다. 강렬한 분홍빛 색채를 가진 아이였다. 조심히 다가가 길을 잃지 않았냐 묻는다면 혼자 남겨졌다고 대답한다. 그는 아이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자. 이전에는 못했으나 지금은 구할 수 있으니. 아이는 디안의 품에 꼭 안겨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이름, 알려주세요.

"디안, 디안 리오네트야."

"이름 완전 멋져요! 헤헤, 이름이 꼭 듣고 싶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우연이네, 나도 네게 이름을 꼭 알려주고 싶었거든."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흐른다. 언젠가의 불길 속의 사죄가 다시 온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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