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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자유를 위하여.

by @Zena__aneZ 2024. 8. 8.

꽃이 피어나 화사한 계절이 돌아온다. 온갖 꽃들이 정신 사납게 피어난 날에는 꼭 그 향기에 묻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설화는 제 앞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을 본다. 온갖 독이 역겨운 향을 풍기며 뒤섞인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투명한 초목빛의 눈이 무감정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알았다. 이 집안사람들은 서로를 증오하기에 급급했으니까. 마치 살아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증오라도 되는 것처럼.
 
"이 독, 네 것이 맞느냐?"
 
설화는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 독은 설화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건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사람을 죽이고 난 이후에 그 죄를 뒤집어쓸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죽은 자는 독살당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아닐 것이다. 다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고작 그런 진실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설화는 제 앞에 던져진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똑바로 고개를 들고 입을 연다. 예, 제 것이 맞습니다.
왜 그랬냐는 질문이 들려온다. 그것에 할 말은 없었다. 어떤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평소에 짓던 미소를 그대로 지어 보이며 대답한다.
 
"그 존재가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혼자만 사랑받고 있고 멀쩡한 것 같은 모습이 가증스러웠어요. 혼자만 곱게 있는 것이 분했고요. 사실은 그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았나요. 누군가는 그런 말들을 듣고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다른 누군가는 시선을 똑바로 두지 못했다.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기억나서인지, 꼴에 부끄러움은 느끼는지... 그런 말들을 다 내뱉고 나니 누군가가 멱살을 잡는다. 설화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아버님, 집안에 쓸모없는 것을 키우셨네요. 입가에 미소가 넘실거린다. 그것은 냉소와 궤를 같이 했다. 언젠가 타인의 입에서 내뱉어진 칼날 같은 말을 품고만 있던 가장 고운 아이였다. 그 마음이 사정없이 찢어지고 나서야 흘러나온다. 설화는 이런 일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만 같다고 느꼈다.
설화는 그 일 이후로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평화로워 보였던 그 짧은 생은 사실 지옥이었고, 그렇게 갇혀있기만 하던 시간이 덧없이 평온하다고 느꼈다. 굳이 웃지 않아도 괜찮고, 애써 힘낼 필요가 없는 것이 이토록 평온해서... 설화는 그런 평온함 속에서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아주 맑고 투명한 웃음이었다.
 
설화는 어느 순간 처형인의 앞에 섰다. 사실은 조금 무서울 줄 알았으나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그저 자유로울 뿐이었다. 한참이나 음식을 먹지 못해 발걸음이 흐트러질 법도 했으나 설화에게 허기란 익숙한 것이었다. 어떤 통증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고통받은 삶이었다. 처형인의 앞에서 후련하게 웃다가 뒤돌아본다. 차가운 눈빛과, 동정의 눈빛과,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빛들이 보인다. 설화는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제게 찾아와 자주 울었어요. 둘째 오라버니가 무섭다면서. 그 말을 들은 이는 경악했고, 듣지 못한 이는 여전한 눈빛을 보낸다. 이 생에 아무런 미련도 뭣도 없었으나 그 말을 내뱉은 것은 작은 복수심일 뿐이었다. 처형인은 잘 벼려진 검을 높이 들었다. 그것을 피할 수도 있었고 충분히 대응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이 고통이 끝나는 것인데 이것에 어떤 두려움이 있겠는가. 이것은 그저 자유로워지는 것일 뿐이니... 설화는 눈을 감아낸다. 봄꽃이 마구잡이로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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