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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잊을 수 없는.

by @Zena__aneZ 2024. 8. 12.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망각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히고, 지워지고, 또는 추억의 형태로 덧씌워지곤 한다. 망각이 신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삶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그 어떠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설령 아무리 끔찍한 악몽이라고 할지라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망각이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한다. 아무리 속을 찢어발겨놔도 잊을 수 없다. 소피엔은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완전기억능력은 아주 편리하면서도 굉장히 불편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부끄러운 것, 잔인한 것조차 잊을 수 없었다. 가끔은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그러지 않았던 것은 분명 텅 빈 것에 대한 공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존재는 기억에서부터 비롯되니까. 결국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까 하는 공포심이었다. 결국 이것조차 자신의 한 모습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거의 상처를 수많은 기억들로 밀어내고 나서 겨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다만 아직도 마물을 마주하게 되면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고, 그것은 역겨움이나 혐오감, 그때의 무력감을 계속 불러왔다. 사실은 그런 일이 괜찮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괜찮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소피엔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결국 친절함에 기대어 살아가니 이 정도로 괜찮지 않은 것은 그리 신경 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도 늘 불안했다. 소피엔에게는 과거의 기억이란 마치 방금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그때와 같은 끔찍한 통증만 없을 뿐이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는 데에는 꽤나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상황도 있기 마련이니까... 잠에 들기 전에는 유독 이름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이제는 과거의 그때처럼 크게 다칠 일도 없고 마물과 만날 일도 없건만 불안감은 문득 솟아오른다. 왜 이토록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늘 불안함을 동반하곤 했으나 이번만큼은 조금 더 기묘했다. 별일 없겠지, 그렇겠지. 스스로에게 말을 던지며 의체를 연결해 둔 것을 빼고 의안과 손에 심어둔 칩의 전원을 전부 차단하고 눕는다. 이번 밤은 아주 길 것 같다는 불안감과 함께 눈을 감는다.

 

소피엔은 가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곤 했다. 아주 친밀한 용병을 부르기도 하고, 선뜻 친구나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을 부르기도 했다. 오늘도 초대받은 사람이 있었다. 헤나는 소피엔과 생활패턴이 무척이나 다른 사람이었지만 소피엔은 그런 것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친하면 한 번씩 초대하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불이 다 꺼진 집안은 고요했고, 그러한 고요함은 평화로운 느낌이 있었다. 소피엔의 집은 그의 분위기와 꼭 닮았다. 적막으로부터 오는 평온함이라니, 그것은 아주 기묘하고도 부드러운 감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집안을 조심히 둘러보다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 적막함을 깨고 나는 야트막한 소리. 그것은 전혀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분명히 어딘가 아프게 느껴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은 소피엔의 방이었다.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은 실례였지만 들어가지 않기에는... 나중에 사과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방문을 열었다.

소피엔은 한참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소피엔이 결코 잊지 못할 끔찍한 기억 한 자락이다. 꿈속에서는 마물에게 다리가 뜯어 먹혔고, 목이 뚫리고, 불타는 것만 같은 독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 어떠한 것도 잊을 수 없는 자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하다. 손은 허옇게 질릴 때까지 이불을 움켜쥐고 있었고,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목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 그리고 작게 앓는듯한 소리가 뒤섞여 흐른다. 헤나는 조심히 걸음을 옮겨 침대 위쪽에 잠시 앉는다. 악몽을 꿀 때, 특히나 가위에 눌리는 것 같을 때는 성급하게 깨워선 안 됐다.

 

"소피엔,"

 

조심히 소피엔의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이불 위로 토닥이며 하염없이 이름을 부른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는 악몽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아가야, 그리 부르며 조심히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소피엔이 몸을 움찔 떤다. 잠에서 드디어 깬 듯이. 헤나는 소피엔의 몸을 조심히 감싸 안았고, 소피엔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떨어댔다. 굳이 묻지 않아도 꿈에서 아주 나쁜 것을 봤다는 것은 명확했고, 소피엔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이였으니... 기억하는 것도 저주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느릿하게 도닥일 뿐이었다. 소피엔은 그런 토닥임에 또 과거의 한때가 떠오르고 말았다. 유일하게 다정했던, 이제는 없는 친가족. 그 야트막한 온기가 자꾸만 뇌리를 맴돌며,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질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는 소피엔을 조심히 눕혀주고 곁에 앉아 머리칼을 하염없이 쓰다듬어주고 넘겨주었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이 피부에 달라붙은 감각은 싫을 테니까. 그렇게 하염없이 곁에 있으며, 다시 찾아온 밤은 다정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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