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캐 로그

최후의 사진작가.

by @Zena__aneZ 2024. 8. 20.

이 세상은 무너졌다. 국가 간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법률은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수많은 인종이 사라졌다. 차별하던 사람, 차별당하던 사람, 절망하던 사람과 구원을 찾는 사람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 이 세상은 천천히 인류의 멸망을 향해 움직인다. 다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평화를 불러왔다. 인종의 구분이 없으니 깊게 새겨진 차별이 사라졌고,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으니 혐오도 없으며, 법률이 없으니 범죄도 없다. 세상의 끝자락에 남은 마지막 인류는 고요한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고요한 종말은 이윽고 평화를 뜻했다.
그 끝자락에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지금까지 작동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주기적으로 관리했기에 큰 문제없이 잘 작동했다. 다만 오래된 물건이라 언제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이 종말의 시대와 퍽 잘 어울리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아, 용지가..."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사람은 문득 카메라를 내려다본다. 용지가 다 떨어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이 근처에 분명 카메라 가게가 있을 터였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이 축축했다. 흙이 질퍽거리며 밟힌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건물이 황홀하게도 반짝였다. 그것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작은 가게였다.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고, 햇살이 문 사이로 매끄럽게 쏟아져 들어온다. 익숙한 걸음으로 카메라 샵 안을 둘러보다가 한 곳에 걸음이 멈추었다. 흰색 바구니 안에 필름이 몇 박스 들어 있었다. 이제는 제법 많이 빈 가방 안에 필름 박스와 카트리지를 전부 털어 넣었다. 이 정도면 몇 달은 괜찮겠지. 그리 생각하곤 가방을 멘다. 몇 년간 잘 이용하던 카메라 가게였는데 이제는 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부의 풍경을 찍어서 사진을 올려두곤 문을 닫고 나온다. 언젠가의 누군가가 저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사진을 보고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위로받을 수 있도록. 단단하게 입고 있던 겉옷 위에 찬 바람이 닿는다. 짧은 머리칼이 흔들린다. 그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의 온기가 애틋하다.

걸음을 옮긴다. 다 녹슬어버린 전철이 보인다. 그 위로 자라나 있는 들꽃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조차 너무 아름다워 다시 사진을 찍는다. 머지않아 사진이 출력된다. 그는 사진을 들꽃의 아래에 놓는다. 그는 전철 안을 둘러본다. 다 녹슨 바닥이 끼익, 끼익, 바스락... 여러 인공적인 소리와 자연적인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전철 안의 풍경도 찍어 출력된 사진을 볕 잘 드는 의자 위에 올려둔다. 이런 행위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이 사진들은 모두 세상에게 바치는 편지였다.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간다고. 삶에 기쁨이 있었고, 죽어감에 기도를 하며, 영원한 종말은 안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랗게 자란 나무에는 과일이 달렸다. 과일 하나를 조심히 따서 한입 깨물면,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한껏 늘어져있노라면 잎사귀가 한들한들 떨어져 뺨을 간지럽힌다. 아, 평화롭다. 한때나마 사회에 속해있던 사람은 지금이 덧없이 평화롭다고 느꼈다. 그것은 분명 자유로움에서 비롯되는 생각이다. 이전 사회에서는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정도로.
나무에 머리를 기대었다. 올려다본 나무의 잎사귀는 자연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먹던 것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출력되었다. 건물 한가운데 무성하게 자란 사과나무라니, 마치 선악과를 처음 본 사람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반쯤 눈을 감았다.
이 세상 최후의 사진작가는 무성한 녹음에 묻혀 평화를 누렸다.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혼  (0) 2024.08.23
청소합시다!  (0) 2024.08.21
넘어지고 마는.  (0) 2024.08.19
선명한 푸름은 자유이니.  (0) 2024.08.17
물빛 초목.  (0) 202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