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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무덤의 세계.

by @Zena__aneZ 2024. 9. 3.

이곳은 안식처이다. 안식이란 곧 죽음을 뜻했고, 이윽고 숨을 쉬지 않게 된 생명은 탁류를 타고 흘러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그곳을 사후세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곳을 죽은 자들의 화원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누군가는 무덤의 세계라고 불렀다.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많은 세계였다. 관을 이고 걷는 괴수와 닮은 것. 더 이상 형체를 갖추지 못한 것들이 잿빛의 세계를 영원히 배회한다. 생명의 종말이 바람처럼 휘날린다. 한때 살아있던 피부, 이제는 썩어 문드러지는 살갗에 닿는 감각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다만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니, 아, 정말 죽음이 가까워지는구나. 그리 생각한다.

제 이름조차 버리고 영웅이라고 칭해진 자는 죽은 자들의 화원 속에서 시들어간다. 한평생을 누군가를 위해 산 삶이 스러지는 것은 그리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끝내 버림받은 자에게 잘 어울리는 모습일 터였다. 그는 피로한 듯 눈을 끔뻑인다. 죽음은 졸음과 함께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또 아니었나 보다. 끝에서마저도 아픔과 함께하니 원망스러운 삶이었고, 그럼에도 선명하게 살아갈 적보다 아픈 것이 덜하니 그리 나쁘지 않은 죽음일 테다. 잿빛의 하늘에 매캐한 바람이 불어 다시 뺨을 두드린다. 한스럽다. 지독하게 한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을 뿐. 하지만 어찌 모든 생명이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내 삶은 조금 더 가혹했을 뿐이라고 되뇐다면 평생 흘려본 적도 없는 눈물이 일렁이는 감각이 느껴진다. 우스운 일이었지. 사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리 간절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는 메마른 눈을 깜빡인다. 물기 하나 없는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 혹은 사신의 발자국 소리였나? 한껏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묵직한, 어딘가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져 제 앞에 선다. 검푸른 탁류색 머리카락, 그 사이에서 빛나는 붉은 눈은 마치 이 세상의 주인인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의 주인입니까? 그 말을 들은 자는 대답이 없었다. 아주 차가워 보이는 희고 얇은 손을 그를 향해 뻗을 뿐이었다. 살길 바라나요? 그 말에 알 수 없는 것이 일렁거린다. 살고 싶냐고? 살고 싶었던가? 고요한 수면 위로 파형이 퍼진다. 살 이유는 많았다. 다만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이유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구하기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 누군가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 자신만큼은 끔찍하게 사랑할 수 없었으나 남을 위해서만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혹자는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부정하지 않았다.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은 그가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으니까.

 

"당신은, 죽음을 바라나요?"

 

다정한 만큼  매정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감정 깃들지 않은 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떠한 것보다도 따뜻했다. 사실은 살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고. 한 번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을 고르고 싶었다. 생각해 본다면 이 자리에서 숨이 멈추는 것이 오롯이 그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음이란 알 수 없는 영역이고, 알 수 없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결국은 죽음이 두려웠다. 모두가 괴물이라고 불렀으나 그는 사람이었으니... 볼품없이 찢어발겨진 손을 뻗어서 탁류를 닮은, 혹은 그 무엇보다도 깊은 밤하늘을 닮은 자의 손을 잡았다. 뻑뻑하게 메마르고 열이 나는 것만 같던 눈에 서늘한 감각이 깃든다. 열이 들끓던 몸이 서서히 나아진다. 아픈 줄도 몰랐던 몸에 평생 깃들어있던 통증이 옅어진다. 괴물을 닮은 자는 이 슬픈 무덤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의 요람이 되는 이 잿빛의 세상에는 극광을 닮은 빛무리가 일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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