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캐 로그

가치있는 세상.

by @Zena__aneZ 2024. 9. 4.

이 세상은 가치 있는 세상이다.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세상이었다.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이었으나 그럼에도 이 땅에서는 생명이 자라난다. 아스테르는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여겼다. 눈이 멀듯한 흰 설원은 사실 죽은 자의 뼈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디찬 세상은 잔인했고, 혹독했다. 검게 그을린 듯한 탁한 빛깔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황혼의 가장 어두운 분홍빛을 빼와 박아 넣은 듯한 눈은 늘 생기가 없었다. 북부의 종교는 잘못되었다. 이것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 아스테르는 언제나 그랬듯 침묵하기를 택했다.

겨울은 눈물과 고요의 계절이다. 모든 소리가 눈에 파묻혀 사라진다. 의미 있는 것은 없었다. 생이란 부질없다. 아스테르는 설원의 한가운데 누워서 눈을 깜빡인다. 어린 신자들을 데리고 나가서 마물 사냥하는 것을 구경시킨다는 미친 생각을 누가 했는지 궁금했다. 사실은 그냥 이단자로 몰아서 다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짧은 한숨을 내쉰다. 상처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아직 여린 피부가 따끔거렸다. 아무리 눈부신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마물과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은 무리였으려나. 아스테르는 마물과 뒤섞여 있는 제 모습이 틀림없이 마물처럼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회도 미련도 추억도 없다. 여기에서 눈을 감아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생기기에는 이 세상은 혹독하게 추웠으니까. 아스테르는 뻑뻑한 눈을 감으려고 하다가 눈앞에 반짝이는 빛에 표정을 찌푸리다가 눈을 뜬다. 그렇게 마주한 것은 구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스테르와 비슷한 나이처럼 보이는 이는 과실의 붉은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옅은 파형이 퍼지며 주변을 보호하듯 방어막을 펼친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능력이었다. 단발의 머리칼이 설원 위에서 흩날리는 모습과 선명한 녹음 가득한 눈이 마치 어딘가 성서에서나 나올 법한 천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상처가 심한데, 잠시만!"

 

그 사람은 조심히 치유술을 걸고는 손을 내밀었다. 아스테르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손이 아파?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말을 조심히 이었다. 제 손이 더러워서요. 당신 옷이 더러워질까 봐. 그 말에 걱정하지 말라며, 더러워진 옷은 나중에 깨끗하게 하면 된다고 말하고는 아스테르의 손을 잡고 일으킨다. 아스테르가 지금껏 봐온 미소 중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이 지독한 설원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미소를 사랑하게 됐다. 그것은 틀림없는 흐름이었다. 다만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알았으니까. 이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이었고, 그런 감정에 상대가 보답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애틋함 하나로 살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완벽한 지옥이 되기도 했다.

 

그가 죽었다. 겨울 속에서 가장 화사하게 빛나던 사람은 죽어버리고 말았다. 명확한 이유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 아스테르는 한겨울 속의 봄날 같던 사람의 강인함을 사랑했으나 동시에 사랑하지 못했다. 이 세상이 당신을 죽인 것이다. 사실 그리 가치 있는 세상도 아니었는데. 당신이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당신이 지킬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다. 고작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아스테르는 길게 슬퍼하다가, 아주 오래전, 어떤 날에 하지 않았던 선택을 했다. 이 세상은 가치가 없으니 무너트려버리자고. 가장 깊은 곳부터 썩어서 잘라버리자고. 그렇게 당신을 추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했던 세상은 결국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처로 얼룩진 생이여.  (0) 2024.09.07
復活?  (0) 2024.09.05
무덤의 세계.  (0) 2024.09.03
빛 들지 않는 지하.  (0) 2024.09.01
칠흑빛 술사.  (0)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