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갈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바람에 모두 흐드러진다. 선명한 푸름 깃든 어여쁜 눈이 저기 먼 곳을 바라본다. 마치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혹은, 무언가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하늘색 리본 머리핀을 뺀다. 리본 끈을 다 풀고는 바닥에 툭 놓는다.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을 그토록 많이 들었으나 모닐레는 이따금, 혼자 있고 싶다는 충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하지 못한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다고 느낀 까닭이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간절하게 보고 싶지는 않아."
어느 순간부터 뒤편에 서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건다. 그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모닐레에게 다가온다. 복수를 하러 왔냐는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복수다. 누군가의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 모닐레를 가장 사랑하는 자의 잘못이니, 이 자리에서 모닐레가 죽는다면 가장 완벽한 복수가 될 것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아가씨는 상대를 보고 그저 방긋 웃을 뿐이었다. 내가 일부러 집사까지 떼어놓고 왔는데, 망설여서 되겠어? 그 말을 들은 자는 잘 벼려진 칼을 들고 모닐레를 바라본다. 어째서 흔한 원망조차 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에 푸른 눈동자를 굴린다. 알고 있었어. 우리 가족은 적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아빠가 엄마를... 버렸다는 것도.
"엄마를 그렇게 사랑했던 아빠였는데, 정작 엄마를 기어이 버리고 죽게 만들고 나서는...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궁금해. 내가 죽고 난 뒤에도 그대로일지. 아니면 다른 표정을 지을지..."
"넌 네 아빠를 원망하나?"
"원망. 원망이라... 당신이 우리 아빠를 싫어하는 것만큼은 아닐 거야."
하지만, 분명 원망하고 있어. 평이하고 맑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내뱉는 언어만큼은 지독했다. 홀로 남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웃으면서 지냈으나 그 속은 다 문드러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가족이 다른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니, 그 사실에 너무나도 속이 쓰렸다. 평온한 날이 한순간도 없었다. 모닐레는 사라져 버린 가족이 보고 싶었다. 여전하게도. 내 죽음이 아빠에게 상처로 남는다면 좋겠어. 가벼운 목소리가 하염없이 흩어진다. 살을 파고도는 날붙이의 감각은 낯설었으나 익숙하지 않냐 물어본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늘 어딘가가 뚫린 것만 같은 감각과 함께 살아왔는데, 이렇게 될 운명인가 싶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생각보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춥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삶이 덥혀지는 일은 없었다는 듯. 모닐레는 어느 순간 익숙한 얼굴을 본다. 분명히 떼어놓고 온 사람이었는데.
"맞다, 나는 술래잡기 못했지..."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거지? 짧은 웃음 끝에 졸음이 찾아온다. 분명 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는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편지라도 써둘걸 그랬나. 문득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각났다. 이제는 받을 사람이 없어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어느 날 유리병이 깨진 채로 있었다. 편지는 어디로 갔을까. 바닷물에 모두 녹아 사라졌을까. 알 수 없었다. 모닐레는 제 삶이 꼭 그때 깨져버리고 만 유리병과 같다고 생각했다.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녹아서 사라져 버린 것. 모닐레는 서서히 말라가는 눈을 깜빡인다. 어렸을 때부터 늘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너무나도 피곤했다.
"나, 조금만 잘게."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 목소리가 평온하다. 그런 평온함이 위안이 된다. 내일이면 아무런 일도 없이 눈을 뜰 수만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어서. 모닐레는 눈을 감는다. 길고도 짧은 삶의 끝에서 드디어 평온하게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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