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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달이 밝은 날.

by @Zena__aneZ 2024. 9. 14.

그는 은색 보석을 닮은 빛깔의 긴 머리칼을 조심히 넘긴다. 들이킨 숨에서 시원스러운 밤의 향기가 느껴진다. 얼굴에 피어난 몇 송이의 꽃이 하느작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짙은 꽃내음에 정신이 흩어질 것만 같은 감각이 밀려든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어딘가 아파 보였고, 그런 창백한 얼굴을 반투명한 흰 천으로 가린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얼굴이 달빛에 빛난다. 그의 이름인 월하미인처럼 밤에 곱게 빛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듯 이끌었다. 마치 달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신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다만 그는 혼자인 것이 익숙했고,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은 보일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혹하게 만들 일조차 없었으니... 그것이 비극인가, 한 편의 희극인가?

월하미인을 파먹고 자라난 꽃들은 밤이 되면 달 아래서만 빛나는 고귀한 꽃에게 경배하듯 고개를 숙인다. 연약한 몸을 야금야금 먹어가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한때 그 아름다운 사람은 생명이 좀먹혀 가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어느 날에는 온몸이 갈라지고 찢기는 통증이 함께했고, 어느 날에는 모든 감각이 죽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날에는 그것이 지독하게도 고통스러웠다. 참담하다. 참혹하고 처절하며 가혹한 인생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 질문에 건넬 대답을 찾지 못해서 한참이나 헤매었다. 다만 그럼에도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축복이었다. 아침에 햇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축복이었고 달빛 아래서 숨을 쉬는 것은 기적이었으니 태어났다는 사실을 원망하지는 말자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늘어놓고 본다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으나 주어진 시간이 짧은 사람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고. 조금 더 어렸을 때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그저 밤의 향기처럼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달빛을 받는다. 머리부터 몸을 감싸던 흰 천이 나풀거린다. 그것이 마치 천사의 흔적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에는 살아있다는 게 끔찍하게도 원망스러웠어요. 숨을 쉴 때마다 아팠고, 몸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고요."

 

하지만, 어느 날 깨달은 거예요. 사실은 살아있다는 게 원망스러운 게 아니라는 거.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서, 잘 살아보고 싶어서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거예요. 살아있다는 건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배를 탄 것과 같으니까요. 그 말에는 특별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한밤중에 피는 꽃을 닮은 그 사람은 그저 웃었다. 어느 날에는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것이고, 걷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내장에 염증이 가득 차오르고 피부가 궤양으로 덮이고 어느 한 곳이 잘려나간대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최후에는 꽃에 파묻혀 죽을 것이다. 이 가냘픈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끝날 것이다. 가끔, 아주 가끔은 그런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 두렵다가도, 두려움에 잡아먹혀 모든 삶의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아 웃어버리고 만다. 잘 살고 싶다 생각했으니까. 스스로에게 약속했으니까.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가끔은 원망스러웠지만 그 원망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폭풍우 몰아치는 밤은 위험하나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태양이 떠오르니, 그것을 눈에 담지 못하더라도 아침이 찾아온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던 까닭에 더욱 밝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러니 바라건대, 내가 마주하지 못하는 아침을 누군가만큼은 마주했으면. 그렇게 바란다.

선명하게 너울대는 하늘색 파도빛의 눈이 일렁거린다. 곱게 짓고 있던 웃음은 지워질 일이 없다. 누군가가 그를 떠올린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월하미인의 웃는 모습밖에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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