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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나부끼는 달의 영혼과...

by @Zena__aneZ 2024. 9. 16.

순백의 달빛을 베틀에 직조하여 짜낸 것만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검은 장막 드리운 하늘 아래서 흔들거린다. 그림자 속에 녹아든 자는 유난히 달빛이 밝은 날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이 마구 흔들리고 나부끼 것과 같은 모습이다. 희고 쾌청한 빛깔의 눈은 고고하게 빛난다. 어떠한 부정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손에 들고 있는 한쌍의 검이 밤하늘 아래서 부드럽게 움직인다. 마치 검무를 이어가듯이. 결코 길지 않은 머리칼이 흩날려 얼굴을 전부 가린다. 검무를 춘다는 것은 단순한 핑계였으니, 달빛이 구름에 가려질 때 비로소 온전히 사라진다. 그 누구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는 그가 품은 이름처럼 한없이 자유롭게 흔들리고 나부끼는 달의 영혼이었으니까.

자유롭고 강인한 자가 당도한 곳은 비밀스러운 공간이었고, 그 공간만큼 비밀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는 본디 밀회를 즐기는 자는 아니었으며 또한 밀회를 할 만큼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모두가 그처럼 강인하지 않고 떳떳하게 서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는 늘 상대에게 조용히 찾아가는 역할이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창가에 발을 딛고 섰다가 방 안으로 들어간다. 검푸른 옷자락이 길게 늘어진다. 온통 희고 푸른 빛깔을 가진 자의 옷은 그와 잘 어울렸다. 그가 품은 강인함이 모두 드러나있는 색이었으니까. 다만 그가 만나러 간 자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밀회의 상대는 숨기기 위해 검은색을 두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소소."

 

"오셨습니까."

 

짧은 대화의 끝자락에 맞물리는 시선은 깊기도 하고, 옅기도 했다. 혹은 그 깊음과 옅음을 자유롭게 오간다. 한 가문의 가주로 추대받는 사람과 가문에서 버려진 사람이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기묘한 만남인가? 다만 그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밀회를 이어가지도 않았겠지. 독공을 쓰는 자는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향기에 익숙해지지 않을 재간이 없었으니.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짓일지도 모르겠으나 가끔은 침묵이 옳은 일이기도 했다. 오늘은 무엇을 했습니까. 느릿하게 던진 질문이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일으키듯 퍼진다. 전부 담아내고 있던 이야기를 흘린다. 야트막하게나마 기쁘고 즐거웠던 일부터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분명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았다. 그저 재능이 있는 사람을 놓치는 자가 아니었으니 다가간 것이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도 생긴 건지, 혹은 누군가가 원치 않은 동정이라도 던지고 싶었던 건지, 개인적인 마음이라도 생긴 것인지. 언제나 메마른 것과 같은 삶에서 이런 만남만큼은 메마르지 않다 느껴져서인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으나 그는 분명 그 자를 눈에 담아내는 것이 싫지 않았다.

 

"이 집안을 나갈 생각은 여전히 없습니까."

 

"예. 이 밀회가 즐거워졌으니까요."

 

그 말은 거짓임과 동시에 진실이었다. 나가려거든 진작에 나갈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밀회가 있기 전에도 그는 나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나 행위의 아래에는 분명 애정이 깔려 있었다. 무엇에 대한 애정이었는가?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다. 그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왔던 것처럼 창가에 발을 딛고 선다. 언젠가 마음이 바뀐다면 꼭 말해 주세요. 저는 당신이 좋거든요. 반쯤 뒤돌아본 시선이 다시 얽힌다. 무언의 미소만이 흐리게 남았을 뿐. 그는 달빛이 구름에 가려질 때 온전히 녹아내리듯 사라진다. 언젠가는 밀회가 아니라 꽃이 정신없이 피어난 화원 한가운데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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