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암야의 끝자락.

by @Zena__aneZ 2024. 11. 28.

남부에서는 기괴한 평온함과 느릿한 절망이 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숨이 끊어진 육신을 정성껏 약품처리해 움직이게 하는 귀찮은 짓을 하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맞서는 이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기도 했고, 버림 패로 쓰기에 딱 적당했다. 자아도 뭣도 없으니까. 그저 지시한 것만 행하는 로봇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남부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로봇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악질적인 것 말이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체를 조종하는 것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일이 되었다. 무엇이, 어떻게 경악스러우냐 묻는다면 시체를 이용해먹는 과정이다. 죽은 이에 대한 존중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흡사 지옥도와 같은 광경.

살아있을 적 망가진 어깨와 발목이 기이하게 뒤틀린 시체가 우아하게 대낫을 휘두른다. 전투에 능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생기를 잃은 탁한 푸른 눈,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밀색 머리카락, 약품 처리를 거쳐 묘하게 번들거리는 피부. 그 위로 아무리 눈송이가 내려앉는대도 절대 녹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처리해야 할 마물에 가까운 형태였지. 비틀린, 뒤틀린 몸으로 대낫을 휘두른다. 다만 그것은 그가 살아있을 시절의 몸짓과 똑같아서. 그게, 바로 그 사실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연화는 생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두려움이라곤 몰랐다. 생전에는 지킬 존재가 있어서였고, 지금은 모든 것을 말소당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내려찍으려는 금속에 쇠사슬이 얽혀 덜컥거린다. 생기 잃은 눈동자가 굴러가 상대를 눈에 담는다.
세상에서 기억이나 추억보다 더 강한 것은 습관이다. 심장 대신 마물의 핵을 품은 자는 일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충만한 행복감도, 그 무엇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은 습관적인 두근거림이다. 사랑과, 어린 사랑들을 품에 끌어안았을 때 느꼈던... 낯설지만, 결코 싫지 않은 감각. 시체가 행복감이라는 단어도 잊은 채 하염없는 기쁨과 상실의 감각 속을 배회하고 있노라면 이제는 다 커버린 아이가 먼저 움직인다. 다만 길게도 이어진 전투로 단련된 용병이었던 자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낫을 휘두를 때는 조금 더 안정적으로. 부드럽게, 궤적을 만든다고 생각해. 던질 때는 네가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만 해.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 못 이기겠다 싶으면 적당히 치고 빠지는 거야. 모든 것을 지킬 수는 없어. 그건 신이 와도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기억해. 가장 중요한 건 네 자신이라는 것도... 아플 리 없는 몸이 욱신거리고, 없는 심장이 세차게 뛴다. 이것은 분노인가. 설움인가. 기쁨인가. 혹은 그 무엇도 아니며, 그 모든 것이었나...

습관은 이윽고 기억이 되고 추억을 불러온다. 부활이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것은 가혹하다. 한 사람에게 여러 번의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니까. 죽은 사람이 또 죽어야만 한다니. 이것은 저주다. 가혹하다. 류일은 아득한 눈빛을 하고 있는 시체를 조심히 끌어안는다. 눈송이가 녹지 않는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온기가 없으니까.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사람, 부활하고도 제대로 살아나지 못해 또 죽어버릴 사람이 손을 움직인다. 연화는 흐릿한 표정을 짓는다. 웃음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하물며 설움이나 분노, 그 무엇도 아닌 표정이었다. 단지 그것이 가혹한 삶 속에 존재하는 고요함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더듬더듬 움직이며 제 아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낸다. 눈물이 많은 건 아빠를 닮았구나.

류일은 여전히 찬 몸을 끌어안고 있다. 시취가 느껴진다. 시취가 익숙한 생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죽음을 추모할 수 있으니까. 그때는 하지 못한 것이었다. 시체조차 찾지 못해 슬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슬퍼할 수 있다. 안도감이 들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자꾸만 눈물이 났다. 연화는 계속 눈물을 닦아준다. 이렇게까지 아빠를 닮을 필요는 없었는데. 그 말에 또 웃음이 나는 아이러니가 자꾸만 속을 헤집는다.
마지막 생명이 빠져나간다. 끈질기게 붙든 생명의 박동이 약해진다. 내 아가야, 내 목숨이 다하더라도, 내 영혼은 언제나 너희를 사랑하고 있어─  연화는 마지막 숨과 함께 사랑의 언어를 남김없이 쏟아내었다. 그 말에 선명한 웃음이 깃든다. 언젠가의 누군가가 사랑해 마지않던 미소였고, 아이들이 믿어 마지않던 강인함이었다. 남부의 혹독한 여름밤이 드디어 끝나간다.

'자캐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의 시대 - 흰 꿈  (0) 2024.12.02
암야의 왈츠.  (0) 2024.11.26
마음정리.  (0) 2024.11.24
원망과 그리움.  (0) 2024.11.20
나의 친애하는 절망감.  (0) 2024.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