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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짙푸른...

by @Zena__aneZ 2025. 2. 13.

"펜비 씨, 손님이 오셨는데..."
 
펜비는 의료실 안쪽에서 상처를 소독하다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찾아올 손님이 있었나? 잡아둔 약속은 없었는데. 상처에 밴드를 감으며 생각하던 찰나에,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알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가 찾아왔다고? 남부 용병길드에, 혼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상처 위에 마저 밴드를 감곤 옷가지를 다듬어 말끔하게 정돈한다. 곧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내리곤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가 무슨 이유로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걱정이 앞섰다. 정말 다치지는 않았는지,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혹은 다른 일이 있는건지….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고, 심지어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 정도는... 펜비는 어쩔 수 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곧 가족을 보곤 정갈한 웃음을 띤다.
 
"어머니, 무슨 일로-"
 
"펜비, 집으로 돌아오렴."
 
... 네? 바보 같은 말을 던지고 나서야 상황파악을 끝낸다. 이런 말을 다시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기대라도 한 건지. 걱정 한 마디 정도를 바랐던 건지... 급히 가족의 팔을 잡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대화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펜비는 용병길드 바깥에서 잡았던 팔을 놓았다. 미처 밴드를 감지 못한 손에서 뜨끈한 열감이 느껴지는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은 채로. 뒤돌아 얼굴을 마주하니, 알 수 없는 마음이 느껴진다. 애써 불안을 가라앉히고 할 말을 차분히 정리했지만...
 
"어머니,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저는-"
 
"다른 가족들이 다 위험해질 뻔했어! 너도 이렇게 다쳐서는, 대체..."
 
펜비는 지끈거리는 통증을 느낀다. 오래 전에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통증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옛적에도 이런 대화를 한참이나 나누었는데, 10살에 하던 대화를 24살이 되어서도 하고 있다니. 잠시 이마를 손으로 짚다가 다시 말을 차분히 이어간다. 이 일은 제 불찰이 맞아요. 하지만, 저는 정말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호적 정리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이는 참을성이 다 떨어진 듯, 아니면 무엇이 그리 억울했던 건지….
 
"자유, 그깟 자유가 대체 뭐라고! 그것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해야만 하겠어?!"
 
자유 정도는 포기하고 살 수도 있잖아! 안락함에 기대어 살 수 있는 기회를 왜 버리려고... 속이 울렁거린다. 그깟 자유? 그 자유가 무엇 위에 쌓인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있나? 그동안 해온 모든 말들이 무슨 소용이었던 건지…. 집중력이 모조리 흩어진다. 차분히 정리하던 말이 전부 엉망이 되었다. 왜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의 앞에서는 이토록 쉽게 감정적이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누군가가 반드시 포기해야만 되는 건지. 왜...
 
"그만 하세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펜비!"
 
"그만 하시라고요!... 서류 정리도 곧 끝날 거예요. 찾아오실 필요도 없고요."
 
그깟 안락함 따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저를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포기하듯 내뱉은 말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심해진다. 한참이나 침묵이 감돌았고, 먼저 걸음을 떼는 건 펜비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앞으로 영영 내뱉을 일 없는 말이 하나 더 생겼다. 정말 가족이라고 여겼던 이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는데, 그들을 닮은 사람조차 없어서. 빗대어 그리워할 수조차 없었다. 곧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잠시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걸음을 옮긴다. 하늘이 여전히 짙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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