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목도리가 찬 바람에 흔들린다. 담홍은 풀어질 것 같은 목도리를 꼼꼼히 다시 싸매고는 밝게 웃는다. 신, 춥지 않아? 애정 서린 목소리가 상냥하고 따뜻했다. 신도 웃었다. 안 추워. 언니랑 오빠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봐. 다시 꼭 마주 잡은 손이 따뜻하다. 미약한 온기만이 서린 손이었지만 이 눈밭에선 모든 것이 따뜻했다. 판도라는 느긋한 손길로 신의 머리칼에 붙은 눈송이를 털어내 주곤 천천히 걷는다. 온통 눈밖에 없는 혹독하게 추운 곳이지만, 가끔은 이런 산책도 나쁘지 않지. 그러게.
신은 잠시 걷다가 문득 말을 꺼낸다. 오빠 고향은 여기지? 여기는 어떤 곳이야? 판도라는 잠시 고민한다. 어떤 곳이냐는 질문의 범위가 넓은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상처 입히지 않고서는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지. 살아남기에 혹독했으니까. 적은 자원과 광신적인 믿음이 뒤섞인 곳은 잔인했다.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이곳은 점차 신을 향한 광기 서린 믿음이 퍼진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상냥함과 자유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새장의 문을 열고 날아가는 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북부는 그런 곳이야. 신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온통 눈밖에 없는 이곳은 신에게 새로운 감각을 불러온다. 이상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를 것. 황금빛 햇살 어린 흰색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밝았고, 하늘에 깔린 파란색은 동부에서 보던 것보다 더 창백했다. 이 햇살 머금은 설원은 분명 한낮임에도 깊은 시간을 건너온 황혼처럼 보이게 했다. 지평선과 순백의 산맥이 얽힌 신비로운 설원은 고요하고 광막하다. 느릿하게 감았다 뜬 눈에 길게 불어오는 바람이 얽혀든다. 그리고, 걷는다. 온전히 제 의지로. 긴 옷자락이 마치 날개처럼 휘날리고, 피부를 파고드는 냉기가 생소했다. 이런 곳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를 찾으며 날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입에서 흰 입김이 새어 나온다. 고개를 높이 들어 파랑을 눈에 담는다. 선명한 붉은빛의 눈에 황금 이채가 아른거렸다.
또다시 걷는다. 좋아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것들을 나누며 걷는 시간이 소중했다. 신은 무엇보다도 밝게 웃었다. 이토록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귀신과 대화하는 것이 위험했을지도 몰랐지만, 위험하다고 모든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자유를 바라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눈밖에 없는 광막한 풍경이 신과 잘 어울렸다. 무척이나 시원하고 좋은 기분이 들었다. 흰 설원과 황혼을 닮은 낮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좋아하는 이들과 보는 좋은 풍경이라서 더욱...
신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한 쌍의 발자국만이 남았고, 그마저도 대부분 쓸려나가 사라진다. 흔적을 영영 상실한다. 죽은 자들은 무언가를 잘 남기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의 흔적마저 사라지는 것을 보니 서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몰아친다.
"설원의 가장 나쁘면서도 좋은 점은 모든 것이 쉽게 지워진다는 게 아닐까."
"지워짐이나 상실은 꼭 슬픈 게 아니야."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머리에 얹히는 손의 미약한 온기가 소중했다. 신은 다시 앞을 바라보곤 웃었다. 그저 슬퍼하기에는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애틋한 탓에. 셋은 정다운 말을 나누며 걷는다. 황혼 닮은 낮의 광막한 설원에서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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