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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

행동의 아이러니.

by @Zena__aneZ 2025. 2. 14.

바람 부는 소리가 거셌다. 방금까지 웅웅대며 퍼지던 소란과 비명이 씻겨나가듯 사라진다. 코어는 바닥에 어지럽게 퍼진 것을 응시한다. 바닥에 퍼진 것을 분석하는 듯 잠자코 바라보다가, 아이리스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코어, 이곳에서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코어는 주변을 둘러본다. 밑까지 범위를 확장해 주변을 스캔했지만 잡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없습니다. 경계 구역에서 대기하십시오. 건조한 목소리가 끝나자 아이리스는 팀원들에게 가벼이 손짓했다. 돌아가 대기하라는 수신호. 그것을 확인한 이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이리스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코어는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주변을 계속 둘러본다. 일정 시간동안 특별한 위협이 없으면 돌아가도 됐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약한 진동이 퍼진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 머지않아 데이터 속에 남아있는 이의 모습이 보인다. 코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붉은 안구가 빛을 받아 옅게 빛난다. 바람 소리가 여전히 거세다.

"... 오랜만이네요. 이 인사가 적절할까요?"

사실 적절한 인사는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인간성을 박탈당한 사람과,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한 것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했을지도 모를 사람. 설령 기여를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충분히 원망받을 위치에 있는... 아포리스는 할 말을 고르다가 평이한 미소 하나를 걸친다.

"저를 기억하나요?"

"데이터 초기화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와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표정과 말투. 바람이 부는 이 어지러운 땅 위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되 사람인 자는 그저 조용히 기다린다. 잘 지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평이한 미소에 얕은 균열이 생긴다. 코어는 그 균열을 알면서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침묵이 바람소리처럼 한참을 늘어진다.

"이런 곳에 계실줄은 몰랐습니다."

"아... 그렇죠."

누가 안전한 삶을 내던지고 나갈 수 있겠는가? 설령 그것이 타인을 짓밟아 얻는 안전함이라고 해도. 일생에서 가장 큰 프로젝트에 몸담구고 있었던 사실이 죄스러워서. 무언가를 하게 되면, 사람은 변화를 겪는다. 좋든 싫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목표, 시선, 의지들. 한때는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변화하며 뒤틀리고 종극에는 잔인함만이 남는다. 아이리스에게는 미안해요. 당신에게도요. 이미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코어는 반쯤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했으나 영혼과 창을 영영 잃어버린 자는 그저 질문을 던진다.

"후회하시나요?"

"많이요."

그 행위는 착취일 뿐이었으니까요. 원망한대도 할 말은 없네요. 아, 또다시 바람소리. 코어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넘긴다. 다행이네요. 그 말만을 던지듯 내뱉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인간성에서 건져올린 한마디가 무겁게 추락한다. 다행인가요. 말이 가볍게 흩어진다. 새가 골라낸 깃털처럼 떨어진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렇게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코어에게는 더 이상 마음이랄 것이 남아있지 않다. 이성적인 행동에 감정이 필수로 필요하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코어는 시간을 확인한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아포리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아까 내뱉은 말들이 건조한 흙과 같이 밟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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